여든 목전에 둔 내 어머니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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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호 /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정양 저 | 창작과비평사 펴냄 | 1997)


이 글이 정양 시인이 쓴 시집 소개가 될지, 이 책을 읽은 내 어머니 이야기가 될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80을 목전에 둔 내 어머니는 5년째 한글을 배우고 계신다. 아직 쓰기는 서툴고 읽기는 어느 정도 하신다. 얼마전에 아들 집을 찾아 대구에 와서 1주일을 지내셨는데, 한글학교에서 나누어준 교재를 가지고 오지 않아, 내 책장에서 아무런 책이나 꺼내어 읽기 시작하셨는데, 그 책이 바로 정양 시인의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다. 처음에는 단지 어머니께서 한글공부에 열성이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어머니가 “이 책 재밌네, 세상 살아가는 사람 얘기를 이리 재미지게 썼네.”하시는데 깜짝 놀랐다.

정양의 시집은 ‘언뜻 보면 지극히 단순해 보이고 소박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나의 어머니가 정양 시집을 재미있게 읽은 것은 이 시집이 한글을 깨친지 얼마되지 않는 노인이 보기에 충분할 만큼 단순하기 때문인가? 80여년 살아오면서 시집 제목처럼 ‘살아 있는 것들’, ‘살아가는 것’, 그 고단함과 무게를 겪었기 때문인가?

아무튼, 소설을 좋아하고 시는 뜬구름 잡는 소리 쯤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는 이래저래 놀라운 일이다. 어머니가 재밌어 한 정양의 싯구절을 소개한다.
 
정양 | 창작과비평사 | 1997
정양 | 창작과비평사 | 1997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 한다/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 했던가

-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에 여자 뿐이라 모내기 논물대기 싸움에서 항상 밀려 오밤중에 도둑물을 대 가며 힘들게 농사를 지으셨단다. 농부 인심이 풍년에는 더없이 풍족한데, 가뭄에 논물 댈 때는 영 딴판이란다.

창문을 닫았던가/ 출입문은 잠그고 나왔던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자꾸만 미심쩍다/ 다시 올라가 보면 번번이 / 잘 닫고 잠가놓을 것을/ 퇴근길 괜한 헛걸음이 벌써/ 한두번이 아니다

- 어머니의 기억력이 예전과 같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이 글을 보고 노친네가 웃으신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런가 하고 위안을 삼으시는가.

지긋지긋한 이 아파트 말고/ 어느 산기슭 어느 시냇가에/ 집 하나 이쁘게 짓고 사는 것이/ 아내는 소원이라 한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기르고/ 오가는 새들 모이도 뿌려주면서/ 채소랑 곡식이랑 감 대추들 다 가꾸어/ 고맙고 다정하고 아까운 이들과/ 골고루 나누고 싶다고 한다

- ‘말 못하는 짐승들도 기르고’ 이 대목에서 노친네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어릴 적에 어른들 말에서 ‘말 못하는 짐승’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어머니는 자신이 흔히 하던 말이 글로 표현된 것을 무척 신기해 하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짜 김일성 교육’이라는 시를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이 든 사람들 말로는/ 왜정 말기에도 각급 학교에서/ 가짜 김일성 교육이 있었다고 한다/김일성이 가짜인지 교육이 가짜인지/ 육이오 이후에는 나도/ 가짜 김일성 교육을 받았고 가르쳤다//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82세의 그 북한 주석이 죽었다/ 그는 진짜로 가짜 김일성인가/ 온 세상이 며칠이고 며칠이고/ 그의 죽을을 낮밤으로 떠들면서 정작/ 그토록 열올리던 진짜 가짜 문제는/ 아무데서도 아무런 말들이 없다// 마른 장마와 무더위와 가뭄의/ 이 여름이 유난히 길다/ 80년 만의 무더위라고들 한다/ 숨막히는 이 진짜배기 무더위는 아무리 진짜라도 어차피 지나갈 테지만/ 비바람도 태풍도 겪어가면서/ 어떻게든 가을도 겨울도/ 통일도 올 테지만// 신화도 조작도 음해도 아닌/ 진짜 김일성 교육이 언젠가는/ 꼭 필요할 것만 같다

- 어머니도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40대들도 학교에서 그리 배웠다. 그리 배운 40대중 일부는 북쪽의 김일성이 진짜라 할 것이고, 일부는 가짜라할 것이다. 내 어머니는 여전히 ‘가짜’라고 생각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어머니는 별다른 감상이나 정서적인 반응 또는 교감을 하신 것 같지는 않다.


어머니는 이 문제가 자신의 삶에 무게를 더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는가?
‘망할 것들이 여간해서 안 망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보통 일이다’라며 덤덤하신 걸까?

요즘, 국가관을 검증하자, 국회의원 자격이 있니 없니, 난리굿이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치는 삼국지 대목은 재밌기나 하지, 입이 쓰다.
 
 
 





[책 속의 길] 68
하만호 / 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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