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잃어버린 동무를 찾아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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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하 / 『김영민의 공부론』(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 김영민 저 | 샘터 | 2010


어느 한 선배님이 내게 들려준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자.
‘자기비판’은 ‘세수하는 것’과 같다. 내 얼굴의 때를 없애기 위해 나 스스로 깨끗이 씻어내는 노동을 하고 그 후의 상쾌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상호 비판’은 ‘등을 밀어주는 것’과 같다. 내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나의 때를 없애기 위해서는 동지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동지의 손길이 아플 수도 있지만 기꺼이 내 등을 내밀고 때를 벗겨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동지는 기꺼이 힘든 노동을 감내하고 나는 그 아픔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등을 다 씻고난 뒤의 개운함 그것이 상호 비판의 묘미이다. 그런 관계에서 만들어진 동지라면 능히 이제 동무의 길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 나갈 수 없는 존재다. 나 또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그것도 진보의 길을 걷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있다. 그들의 진보적인 몸짓과 마음씀씀이에 감동하고 함께하기를 기꺼이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동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안타까움과 실망의 길 또한 함께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분열로 망한다는 진보의 모습에 힘들어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진보가 끝내 살아남고 이겨나가는 나가는 이유를 찾고자 했다. 나는 그 답을 꾸준히 쉬지 않고 진보의 한 길을 걸어 나가는 이들에게서 찾고 있다. 또한 나도 그렇게 살아나가리라며 채근하고 있다.

김영민의 『공부론』은 이런 나의 막연한 질문과 답에 대해 명쾌하게 해답을 준 책이다. 덤으로 어릴 때 잃어버린 동무까지 찾아주었다.
 
『김영민의 공부론』(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 김영민 저 | 샘터 | 2010.
『김영민의 공부론』(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 김영민 저 | 샘터 | 2010.
이 책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친구, 동지, 동무로 이름지으려하고 있다. ‘친구’라는 명사는 정실과 연고, 인맥과 학맥 그리고 지역과 출신의 그늘을 쫓아다니면서 친구로서의 연대와 실천을 공고히하여 그 오래된 의리를 충량하게 지켜내는 존재로 지적한다. 그러면서 친구라는 명사로부터 동무(同無!)라는 부사로 바꾸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서는, 우리시대의 모든 진보는 헛손질이며 헛힘이며 헛구역질로 남을 따름이라며 비판한다.

동지에 대해서는 신념이나 대의를 가지고 있지만 간헐적인 운동속에서 ‘구호로서의 신념’에 머무르며 ‘글-말-생활’의 성숙에 의해 나타나는 ‘무늬로서의 신념’이 없는 유토피아로서의 한계를 지적한다.

나는 이 책에서 친구와 동지에 대한 지적, 그리고 동무의 길을 제시해줄 때 마치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의 생활속에서 나타난 한계나 신념의 부족의 원인이 까발려지는 기분이었다. 분열된 진보에 대해 안타까워 했던 가슴앓이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이런 쓰라린 지적과 더불어 김영민의 『공부론』은 동무의 길을 제시한다.    
동무의 길은 이러하다. 몸을 끄-을-고 서로간의 차이(同無!)가 만드는 서늘한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길없는 길’을 걸으며 체계와 자아너머로의 산책에 나서는 길이 동무의 길이다. 지속가능한 삶의 양식을 모색해 나가기 위해 함께 어긋내며 어울리며 어리눅어 가는 이들이 동무이다. 동무란 섬세하고도 서늘한 ‘버텨듣기’로서 비판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주고 받는 이들이며, 동지들의 중심주의적 결집대신 오직 동무사이의 약속과 신뢰를 그 기반으로 삼아 호감과 신뢰 사이에 가로놓인 비약의 심연을 그대로 인식하고 공대하는 관계이다.

내게는 이러저러한 관계속에 형성된 많은 친구들이 있고 동지가 있다. 과연 함께 동무의 길을 걷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리고 오늘 내가 만나는 이와 나는 동무의 길을 가고 있는가? 이 책은 내가 그런 질문 속에서 살아가게 하고 새로운 ‘길 없는 길’을 가게 해 준 책이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는 동무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문사(文士)와 무사(武士)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무사야 말로 진정한 동무의 길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지적한다.

저자는 칼을 쓰는 무사에 비해서 글을 쓰는 문사의 알짬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 기(技)에 성실하지 못하고 그 술(術)에 진정성이 없으면 곧바로 죽음을 당하는 ‘삶의 물질성’에 맞닿아 있는 무사와는 달리, 혼탁하고 교활한 언어의 대리전 속에서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좀비-문사들은 그 글자와 이론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문사들은 거짓말이라는 ‘죽지 않는 말’로써 자신의 영생을 구걸할 수 있기에, 무사들이 지닌 절박함이나 그 절박함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네들이 얻어가는 긴절한 성실성을 문사들로부터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진보사이의 논쟁과 모습을 보며 나는 문사들과 무사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진정한 동무의 길을 가는 ‘진정성’을 가진 문사와 무사가 누군지 또렷히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이 내가 선택할 생활 속의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동무일 것이다. 어릴 적 문사들에 의해 지워져버린 ‘동무’가 이제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는 나의 삶 속으로 걸어오게 된 것이다.
 
 
 







[책 속의 길] 85
김병하 / 해직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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