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에 폭설에...멈출 수 없는 중국집 배달원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1.10 10: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0년 배달, 50대 가장 / "눈길에 수십 번 미끄러져...주저앉고 싶지만 나는 아빠"


'철가방'을 실은 빨간 오토바이가 아직 녹지 않은 도로 위를 쌩 하고 지나갔다. 올해로 10년째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는 양모(50.대구 중구 달성동) 아저씨 오토바이다.

9일 오후 5시 30분. 아저씨는 짜장면 세 그릇을 싣고 대구 중구 남산동 빌라에 내렸다. 그늘진 곳이라 녹지 않은 눈이 빙판길로 변했다. 아저씨는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배달 할 때 마다 죽겠다.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수십 번. 눈만 오면 일하기 싫다"고 빙그레 웃었다. 특히, "해가 빨리 져 오후 5시만 넘으면 빙판길이 뵈지 않는다. 아차 하면 사고다. 그래서 빠르게 안타고 살살 탄다"고 털어놨다.

아저씨는 철가방을 꺼내 들고 빌라 계단을 올랐다. 벨을 누르자 주문한 사람들이 나왔다. 아저씨는 철가방에서 짜장면 세 그릇을 꺼냈다. 손님들이 2만원을 꺼내자 아저씨는 허리에 차고 있던 빨간 가방에서 오천원짜리 1장과 천원짜리 3장을 거슬러줬다. 또, 아저씨는 서둘러 오토바이를 타고 같은 동에 있던 한 원룸으로 갔다. 앞서 배달한 집 현관에 그릇이 나와 있었다. 그릇을 수거한 아저씨는 오토바이에 있던 파란색 플라스틱 통에 남은 음식물을 쏟은 뒤 빈 그릇을 철가방에 넣고 가게로 돌아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중인 양모 아저씨(2013.1.9.대구 중구 삼덕동)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중인 양모 아저씨(2013.1.9.대구 중구 삼덕동)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아저씨는 중구 삼덕동 10평 남짓한 ㅇㅇ반점에서 12시간씩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 일을 한다. 한 달 2번 휴무를 제외하면 거의 오토바이 위에서 하루를 보내는 셈이다. 하루 평균 100여건의 배달을 하고 양파나 단무지 같은 음식 재료도 다듬는다. 주문도 받고 청소도 도맡아 한다. 점심시간에 집중된 배달 전화 때문에 식사는 언제나 오후 늦게 먹는다. 아저씨는 "중국집에서 점심 때 밥 먹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있냐"며 웃었다. 

게다가, 요즘 같은 한겨울에는 아무리 꽁꽁 여며도 한기가 옷깃을 파고들어 배달 일도 쉽지 않다. 때문에, 아저씨는 11월만 되면 두터운 겉옷과 내복을 겹쳐 입는다. 고글과 마스크는 늘 목에 걸쳐두고 장갑도 2겹씩 낀다. 헬멧 안에 모자도 늘 써야 한다. 그렇게 단단히 채비해도 겨울철만 되면 아저씨 양 볼과 두 손은 언제나 붉다.

이날도 한 차례 배달을 다녀온 아저씨는 "춥다. 추워"를 반복하며 철가방을 내려놓고 가게 한 가운데 있는 난로에 서서 마른 손을 비볐다. 아저씨는 "걸을 때랑 오토바이 위에서 바람을 맞을 때랑 온도가 완전히 다르다"며 "오토바이 위에서 부는 겨울 바람은 송곳, 얼음. 얼굴을 콕콕 찌른다"고 말했다.  

주문 전화를 받고 있는 아저씨(2013.1.9)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주문 전화를 받고 있는 아저씨(2013.1.9)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배달원이 되기 전 아저씨는 수제화 만드는 일을 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가장이 된 아저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삼촌에게 신발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17살부터 삼촌이 일하던 대구에서 수제화를 만들었다. 그렇게 고향 전라도 목포를 떠났다. 성공해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30대가 된 아저씨는 수제화 공장까지 차려 승승장구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지난 1997년 외환금융위기(IMF) 당시 공장은 부도가 났고 아저씨는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랐다. 이혼을 하면서 부인은 아이와 함께 아저씨 곁을 떠났다. 집도 잃었다. 아저씨는 백수가 된 채 남은 돈으로 찜질방에서 생활했다. 그때 아저씨는 아이를 생각했다. "굶기지 말아야 한다. 세 끼는 먹고 살아겠다"는 생각으로 생활정보지를 살폈다. 그리고, 중국집 배달원 구인란을 발견했다. 망설이던 아저씨는 '학력 상관없음. 오토바이 운전만 할 수 있으면 누구나 가능' 이라는 문구에 용기를 냈다.

아저씨는 "앞길이 막막했다. 주저앉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찜질방에서 생활할 때는 폐인처럼 지냈다"며 "나쁜 생각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나는 한 아이 아빠였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새 출발 해야겠다는 맘으로 평소 좋아하던 오토바이로 먹고 살 궁리를 했다"고 말했다.

배달 전 주문 받은 목록을 입력하고 있는 아저씨(2013.1.9)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배달 전 주문 받은 목록을 입력하고 있는 아저씨(2013.1.9)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새 출발을 하는 의미로 아저씨는 남은 빚을 청산하기 위해 파산신청도 했다. 그러나, 100만원 남짓한 첫 월급으로는 생계를 잇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와 전 부인에게 양육비를 보낼 생각으로 이를 물고 버텼다. 배달 도중 아는 사람을 만나면 창피함에 헬멧을 눌러쓰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에 살이 타다 못해 피부가 벗겨졌다. 습기와 빗물에 앞을 보지 못해 오토바이를 탄 채 수차례 미끄러졌고, 길을 헤매다 배달이 늦어져 '짜장면이 퍼졌다'고 손님들에게 싫은 소리도 들어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고층 아파트 배달은 몸을 축냈고, 담배와 술 심부름까지 시키는 손님들 때문에 자존심도 구겼다. "수백번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모든 지리를 익히게 되자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저씨는 지금까지 철가방을 들고 오토바이를 타게 됐다. 아저씨는 "생명과 직결된 일이라 처음에는 무서웠다. 춥고 더운 곳에서 일하는 것도 적응이 안됐다"며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이바(헬멧)로 가려도 다 알아 보더라" 말했다.

그리고, 배달원 10년차에 접어든 지금은 월급도 200만원 가까이 받게 됐고 예전보다 성격도 활발해 졌다. 내 집은 아니지만 달성동에 월세 주택도 구했다. 쉬는 날이면 친구와 술도 한잔 마시고 키우고 있는 강아지들과 놀기도 한다. 아저씨는 "나처럼 사는 가장들은 다 자식 힘으로 버텨온 것"이라며 "몸이 버티는 그날까지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어, "형편이 좋아지면 고향에도 가고 싶다. 마음은 항상 꿀떡같다"고 씁쓸히 웃었다.

[평화뉴스 - 길 위에 서민 3 (전체 보기)]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