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힘들게 돈 버는데 어매가..."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1.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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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동 노점 할머니, 15년째 도라지 껍질 벗기며..."아파도 나와야 맘이 편해"


"고되지만 자식들이 힘들게 돈 버는데 어매가 앉아서 얻어먹고만 살까. 이거라도 팔러 나와야 밥값을 하재. 구청이나 자식새끼들이나 다 그만하라고 말해도 여기에 나와야 내 맘이 편테이" 


14일 아침 8시 30분 대구 중구 삼덕동에 있는 한 한의원 앞 골목길. 출근으로 바쁜 직장인들 사이에 허리 굽은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밤새 쌓인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치우느라 분주하다. 물청소까지 마친 할머니는 봉지가 가득 담긴 손수레를 끌고 오더니 인도 경계에 있는 한의원 앞 1평 남짓한 타일 위에 봉지를 풀어 식재료를 진열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박모(65.영덕) 할머니는 15년째 휴일도 없이 매일 홀로 길거리에서 식재료를 팔고 있다. 한여름과 한겨울에도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2-13시간씩 장사를 한다. 차가운 타일 위에서 식사도 하고 옷을 뒤집어쓴 채 손님도 기다리고 졸기도 한다. 폭설이 쏟아진 12월에는 빗자루로 눈을 쓸며 장사를 하기도 했다. 때문에, 삼덕동 인근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머니를 알아볼 정도다.

손수레에서 식재료를 내리고 있는 박 할머니(2013.1.14.대구 중구 삼덕동)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손수레에서 식재료를 내리고 있는 박 할머니(2013.1.14.대구 중구 삼덕동)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머니는 대구 동구 반야월에 있는 막내 딸 집에서 출퇴근을 하고 식재료가 떨어지면 할머니 집이 있는 영덕으로 간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두부가 떨어져 일요일 장사를 접고 영덕 집까지 가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새벽 3시 영덕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맏딸의 트럭을 타고 다시 대구로 왔다.

"집에 오랜만에 갔더니 냉방이여서 너무 고생했다"며 "장사할 때 입었던 옷을 벗지도 않고 입고 잤다가 그대로 출근했다"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한데서 장사하다보니 추위도 익숙해진 건지 입에서 김이 나와도 이불 덮고 있으니 금방 잠들었다"며 "춥고 바빠서 멋 낼 시간도 없다"고 말했다.

손수레에서 앞치마를 꺼낸 할머니는 두터운 외투 안에 앞치마를 껴입고 얼굴에 마스크까지 낀 뒤 "청소도 했고 작업복도 입었으니 손님만 오면 된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손님이 오기까지 할머니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끝임 없이 식재료를 다시 정리했다. 차가운 타일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은 할머니는 "엉덩이 차가울 틈도 없다"며 도라지 껍질을 벗기고 다듬었다.

그 때문인지 할머니 손은 하얗게 갈라지고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몇 번 딱지가 생긴 손등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했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제대로 펼 수도 없을 정도로 굽었다. "음식은 깨끗한 손으로 만져야 한다. 내 손 추워도 장갑을 끼고 만지면 먼지도 붙고 계속 빨기도 힘들다. 좀 아파도 참아야지"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박 할머니 노점에서 볶은 깨를 사가는 손님(2013.1.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박 할머니 노점에서 볶은 깨를 사가는 손님(2013.1.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머니는 사과, 볶은 깨, 참기름, 호두, 땅콩, 강낭콩, 조, 수수, 찹쌀, 뻥튀기, 배추, 된장, 고추장, 도토리묵, 가래떡 등 수십 가지 식재료를 팔고 있다. 대부분 영덕에서 자식들이 지은 농작물과 그것으로 만든 음식들이다. 할머니는 이것들을 대구에 팔러 오면서 짬이 날 때 마다 영덕 읍내에 있는 방앗간과 떡집에 들러 곡식을 빻고 떡을 뽑아 온다.  

오전 10시. 손님 한명이 할머니 노점을 찾아 볶은 깨를 사갔다. 할머니는 "이제 1만원 벌었다"며 "한참 눈 오고 추울 때는 장사도 안됐는데 이제 날씨가 풀렸으니 하루에 딱 7만원씩만 벌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만원짜리 한 장을 고이 접은 할머니는 품 속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는 평균 90만원-100만원을 번다. 돈은 적지만 "손자들 용돈도 주고 저축도 하고 맘은 편하다"고 털어놨다.

할머니 고향은 경남 창원이다. 남편을 따라 영덕으로 시집을 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논농사와 과수원을 하며 8남매를 길렀다. 그러나, 40대 중반 남편과 사별 한 뒤 할머니는 더 이상 혼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농사일 대부분을 넘기고 50대부터 대구로 농작물을 팔러 왔다. 하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다. 노점 단속에 수차례 손수레를 빼앗겼고 수십 만원씩 벌금도 물었다.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지금 장사를 하고 있는 한의원에서 입구 공간을 허락해줘 장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구청 차만 지나가면 경기한다. 물건도 팽개치고 들고 가니까. 그래도 한의원에서 '할매도 먹고 살아야지'라고 인심 써줘서 장사한다"고 설명했다. 또, "눈, 비, 바람...구청까지 못살게 굴어도 죽을 때까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자식들 용돈 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러면 못 쓴다"고 말했다.

수레를 끌고 길을 건너는 박 할머니의 뒷 모습(2013.1.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수레를 끌고 길을 건너는 박 할머니의 뒷 모습(2013.1.14)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한참 말을 하던 할머니는 "소쿠리(바구니)를 두고 왔다"며 불편한 다리로 길을 건너 골목 모퉁이에 세워져 있던 수레에서 바구니와 과도를 들고 나왔다.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에서 할머니는 위험천만하게 길을 지나다녔다. 실제로 이곳에서 장사를 하면서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수술을 받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 "다리도 절게 됐고 허리도 잘 펴지지 않는다"고 할머니는 씁쓸히 말했다.

도라지 정리를 마친 할머니는 바구니에 도라지를 진열하고는 다시 봉지에서 감을 꺼냈다. 휴지로 감에 광을 내며 할머니는 연신 콧물을 들이마셨다. "겨울 되고는 감기를 친구처럼 달고 산다.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라며 잠깐 길 건너 식당을 쳐다봤다. 곧, 할머니는 "안되겠다. 화장실 가서 좀 풀어야지"라고 말하고는 인도에서 10m 정도 떨어진 주차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돌아온 할머니는 반짝반짝 광을 낸 감 10개를 길가에 진열하고는 "기자 양반도 이제 들어가야지"라며 감 하나와 뻥튀기 한 봉지를 손에 쥐어주셨다. 사양하는 손길에 고집스럽게 쥐어주시며 "어른이 주면 '고맙습니다'하고 받아야 한다"며 "싫다카면 밉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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