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와 오지로 떠난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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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호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1』(이집트 이스라엘 초기기독교 성지순례기)
김용옥 저 | 통나무 펴냄 | 2008


본래 책을 잘 읽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가장 두려운 사람에게, 느닷없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차마 거절을 못하고 고심하던 중 방학 전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도마복음이야기1, 도마복음한글역주2,3이 생각나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는 반드시 가야만 되는 의무로 여기며 살았고, 성경은 한글을 깨우치면서 읽어야만 되는 필독서였고, 어린시절에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그 누구의 말씀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를 읽으면 창세기 1장 천지창조 부분에서 왜? 라는 의문부호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신약 성서를 읽다보면 역사적 예수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고, 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금기시 되는 것이 많은지에 대한 생각을 했었지만,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료는 한계가 있었던 중 도올 선생의 도마복음에 관련된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매우 즐겁게 책을 읽게 되었고 궁금했던 점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정통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지 말고 곧바로 믿어라. 예수의 말씀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다면서 곧바로 믿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도마복음서 114장을 읽다보면 신약성서 27권에서 궁금했던 부분들이 새롭게 나의 마음에 와 닿으면서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실천할까라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합니다.
 
『도마복음 이야기1』(김용옥 저 | 통나무 | 2008)
『도마복음 이야기1』(김용옥 저 | 통나무 | 2008)
도마복음 제4장 / 예수께서 가라사대,“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하략)”

어른과 아이는 객체화된 개체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측면들입니다. 나 속에 내재하는 아키타입들입니다. 어른이란 노자가 말하는 죽음의 무리이며 화이트 헤드가 말하는 하향(下向)이고, 아이란 삶의 무리이며 상향(上向)입니다. 아이가 어른을 따를수록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어른이 아이를 따를수록 삶의 무리가 생명을 향해 상향의 길을 더듬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 아이로 역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천국은 가치의 전도이며 시간의 반역으로 해석합니다.

현재 우리사회의 제문제를 고려해 볼 때 어린 아이 속에도 고착된 늙은이가 들어 앉아 있을 수도 있고, 늙은이 속에도 유연한 청춘의 열기가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가는 즈음에 우리사회에 또한 나에게 촉촉한 봄비에 솟아오르는 연두잎 새싹 같이 부드러운 노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는 시간이 왔으면 하는 바램과 나 자신이 먼저 상향의 길을 더듬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복음 5:1~7에 보면 “예수가 시몬의 배에서 가르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고, 그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어부가 많은 고기를 낚게 하듯이 우리에게 복을 많이 주는 예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도마복음 제8장은 “그리고 그께서 가라사대 “사람된 자는 슬기로운 어부와 같도다. 그는 그의 그물을 바다에 던져 작은 고기가 가득찬 채로 바다로부터 끌어 올리는 도다. 그 가득한 고기 가운데서 슬기로운 어부는 잘생긴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는 도다. 그는 모든 작은 고기를 다시 바다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가려 얻는다. 들을 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어부의 “슬기”는 바로 그 작은 고기들을 다시 바다 속으로 버리는데 있습니다.  “건짐”의 지혜가 아니라 “버림”의 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든, 은혜든, 축복이든, 성령이든, 모든 것을 얻기만 하는 또한 남 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얻기를 바라는 기독교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버리는 기독교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을 얻을 줄 아는 사람은 잔 것들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남 보다 더 얻기 위해 경쟁하도록 부추김을 받고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슬기로운 어부의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마태복음5:6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그런데 도마복음 제69장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슴속에서 박해를 당하는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그들이야말로 아버지를 참되게 알게 되는 자들이로다. 굶주린 그들이여, 복이 있도다! 배고파하는 자의 배가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완벽하게 메시아적 기독론을 선포하고 있으나 도마는 리얼한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도반들은 금욕하는 자들이며 나눔을 실천하는 자들입니다. 그냥 배고프다고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타인과의 나눔을 위하여 굶주리는 자들이야말로 복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비극은 도처에 깔려 있는 “비만”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탐욕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몸뚱아리만 비만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문명 전체가 비만증세로 파멸되어간다고 도올은 주장합니다. 여기 방랑하는 도반들은 굶주림에 시달려 가면서 까지 나눔을 실천하고 배고파하는 타인의 배를 채워주려고 노력하는데, 오늘 현대인들은 비만에 시달리면서도 적게 먹을 생각도 못하고, 나눔을 실천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실천해봅시다. 먹고, 쓰고 남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나눔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끝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슈바이처 박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박애주의의 상징이요 노벨평화상을 받은 의사로 알고 있는 그는 의사가 되기 전에 이미 세계적인 신학자로서 명성을 휘날린 분이었답니다. 그의 명저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서구 신학사의 진보적 흐름을 총망라하여 일별하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의를 종결지었답니다. 그런 슈바이처는 그가 발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뒤로 하고 의과대학에 학부생으로 진학하고, 의사면허를 획득한 후, 간호사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당대 팔레스타인 민중과 더불어 기존의 질서와 상충되는 운동을 전개했고, 예루살렘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아 억울한 형벌에 처해짐으로써 생애를 마감한 예수! 그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다가 그 예수의 모습을 실천하고자 아프리카 오지로 떠난 슈바이처. 한국의 기독교인 수 1,000만, 가톨릭 교인 300만의 현실에서 교리적 예수만을 찾지 말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모두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실천한다면, 우리 안에, 내 안에 하늘나라가 도래하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 속의 길] 91
박신호 / 경북기계공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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