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명, 낮은 곳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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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높고 푸른 사다리』(공지영 저 | 한겨레출판사 | 2013.10)


요즘 한창 교리공부에 빠져있는 선배가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 이야기”라면서 책을 권했을 때 비종교인인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덥석 책을 받아든 것은, 순전히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이란 말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베네딕도 수도원은 ‘미군기지와 소시지’로 기억된다. 몇 해 전,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왜관 미군기지 독극물 불법매립사건은 숱한 의혹만을 남긴 채 유야무야 되었고 곧 모두에게 잊혀졌다. 그러나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여러 번 열렸던 집회와 문화행사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수도자들만의 공간, 금욕의 땅에서 열린 교류였기 때문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 곳 신부님들의 수제 소시지를 예약판매해서 진실규명에 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흥분했던지! 실상 기부보다는 ‘독일식 수제 소시지’에 꽂혀 쌍수를 들고 줄을 섰는데 결국 무산되어 실망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성스러운 수도원을 ‘소시지’의 이미지로 기억한다는 게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그 때 맛보지 못한 소시지의 유혹은 대단히 강렬했던 것이다.

 
 
지극히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한 수도자가 어떻게 사제로 성장해가는가’를 다루는 소설이다. 수도자들은 철저히 금욕하며 오로지 신만을 사랑할 것을 요구받지만 신은 젊고 아름다운 수도자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혹독하다.

때문에 사제들은 의심과 회의, 분노와 허무, 유혹과 고통 속에서 절망하며 끊임없이 묻는 것이다. “주여 왜, 왜입니까?”하고. 왜 당신이 가장 사랑한다는 인간에게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최고의 고통을 주는 것인지, 신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멱살을 잡았을 거라고.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요한 수사, 수도원 말고는 갈 데가 없는 천애고아 안젤로 수사, 타락의 허무와 종교의 부패에 괴로워하는 미카엘 수사가 그랬다.

그들은 수도원과 수사들에 대한 순진한 나의 환상 - 고매하고 티 없이 맑고 걱정거리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라는  믿음을 여지없이 깨주었다. 범인들과 같이 인생 희로애락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삶은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고, 어느새 내 삶의 의문들에까지 연결되었다.

살면서 “왜, 대체 왜?”라는 반발심을 가져보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만 일어나는지,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하는지, 왜 하늘은 나한테만 무심하신지.  원망에 찬 청춘을 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얻는 깨달음 하나, 역경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람은 그렇게 낮아질 때에야 비로소 성장한다는 것.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던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수도자들은 ‘순명’이라 불렀다. 신이 주는 모든 것에 순명하며 고통까지 사랑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낮은 곳에 머무는 진정한 사제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편, 소설 말미에 드러나는 진실은 사뭇 충격적이다. 베네딕도 수도원에 얽힌 사연은 한국전쟁과 맞닿아있다. 거짓말처럼 깜쪽같이 짜맞추어지는 운명도 놀랍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순교의 적나라한 실체는 너무 끔찍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박해와 순교의 내력 때문에 가졌던 천주교에 대한 숙연함은, 그 모든 것이 ‘아주 작은 각색을 제외하면 고스란히 사실이며 실은 훨씬 더 극적인 일들이 그 안에 잉태되어 있다’는 작가의 고백 앞에서 더해졌다. 요즘 가톨릭 사제들이 시끄러운 사회에 던지는 고요한 경고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이 책이 지나치게 엄숙하거나 무거운 것은 아니다. 금기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재미도 만만치 않으니까.






[책 속의 길] 115
이은정 / 평화뉴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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