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불가능한 한국 사회에 던지는 '레드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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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곤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울리히 벡 저| 홍성태 역| 새물결| 2006)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로 일컬어지는 러시아 출신 화가‧미술이론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그의 그림만큼이나 강렬한 제목의 논문 한 편을 남겼다. ‘und’. ‘그리고’라는 접속사 하나가 제목인 이 논문의 내용은 제목보다 더 강렬하고 명쾌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비교하면서, 그는 단 두 개의 접속사로 두 시대를 요약했다. 19세기는 ‘oder’의 시대, 20세기는 ‘und’의 시대였다.

그에 의하면 19세기는 ‘~이 아니면 ~이다’에 의해 지배받은 ‘or’의 시대였다. 양자택일, 이분법, 분리의 시대였다. 이와 반대로 20세기는 ‘~ 그리고 ~’라고 서술되는 ‘and’의 시대였다. 공존과 병존, 다양성의 시대였다.

칸딘스키에 의하면, 아니 그의 논문을 멀리 끌어올 것도 없이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사유와 인식, 정견과 사상, 일상과 무의식에서조차 서로 공존하거나 병립할 수 없는 양자택일이 ‘알게 또는 모르게’ 강요되는 천박한 19세기다. ‘나 그리고 너’인 20세기가 아니라 ‘내편 아니면 적’인 19세기다. 시류에 맞게 좀더 천박하게 말하면 ‘친박 아니면 종북’인 세상이 되고 말았다. 바른 말 하면 종북, 정부를 비판하면 종북, 부패한 내부를 고발해도 종북 딱지가 붙는다. 관제언론도 모자라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유행어가 됐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다시 오고 말았을까.

이런 세상에 다시 어찌하여 거친 해류, 깜깜한 물속에서 거대한 비참이 입을 벌렸다. 세월호. 사고의 원인에서부터 사고 경위, 긴급 대응과 구조, 사후 수습 어느 것 하나 썩고 무책임하고 속임수고 안일하고 무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있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해경은 이악스럽기는 조폭을 능가했고, 무능하기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죄는 너무 깊고 어둡다. 아직 채 피지 못한 꽃다운 숱한 목숨들을 제물 삼아, 오직 권력의 보위와 안전에만 팔린 천박한 한 국가 시스템이 침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불길한 미세먼지처럼 내려앉는 분노와 슬픔, 막막함을 무지를 수 있는 뭔가를 찾으려 펴든 책이 울리히 벡(Ulrich Beck‧1944~ )의 『위험사회』였다.
 
『위험사회』(울리히 벡 저| 홍성태 역| 새물결 | 2006)
『위험사회』(울리히 벡 저| 홍성태 역| 새물결 | 2006)
1986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일찍이 인류가 누려보지 못한 부(富)와 풍요를 이룩한 산업사회가 사실은 인류의 안전을 저당 잡힌 도박에 중독된 괴물임을 밝힌다. 이를 위해 그는 산업사회의 유래와 내적 질서, 공과에 대한 꼼꼼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이런 이론적 탐사를 통해, 도래했지만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위험사회를 선취한다. 이 책이 나온 바로 그해 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가 일어났고, 이 책은 선취한 예지력으로 낯설고 불편한 새로운 시대, 위험사회의 도래를 적중한 셈이 됐다.

그 러나 이 책을 독파하려면 번역서를 읽는 얼마간의 괴로움을 감내해야 한다. 부족한 독해력의 탓이 더 크겠지만, 종종 글맛이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다. 역자도 그러한 아쉬움을 느꼈는지 친절하면서 함량 높은 서문을 붙였다. 칸트와 마르크스를 읽으려면 독일어 원전을, 프루동이나 라캉을 읽으려면 프랑스어를, 또 가라타니 고진을 읽으려면 일본어 원전을 읽어야 한다지만 그럴 능력은 없고 부지런히 읽을 뿐이다.

“산업혁명 이후 200여 년.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생산력을 보유하게 됐고, 그 결과 명실상부한 지구의 지배자가 됐다. ‘혁명의 시대’와 ‘제국의 시대’를 거치며 확립된 근대 산업사회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인류의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그리고 포드주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풍요의 시대를 이룩했다.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지구적 환경위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풍요의 이면에서 무언가 거대한 문제가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류는 거대한 체계적 위험을 무릅쓰는 대가로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역자 서문은 울리히 벡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추적한다.

“그러나 그 같은 ‘낭만의 시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그 짧은 시기가 봄꽃 지듯이 사라지고 지금까지 산업사회를 실제 뒷받침해온 것은 기술-과학의 발전과 이것에 기반한 군사-경제력이었다. 이른바 합리화 내지는 근대화로 널리 알려진 이 같은 발전의 과정에서 부(富)는 체계적으로 확대 재생산됐고, 그와 동시에 위험은 부를 위해 감수해야 하는 우연적 난관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정상적 개연성으로 변모했다. 그 결과 부의 추구와 그 분배의 문제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산업사회가 그 정점에서 맞이하게 된 것은 구조적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위험사회‘이다.”

산업혁명, 포드주의, 합리화, 근대화, 물질적 풍요로 상징되는 산업사회는 그 풍요를 누리기 위해 기를 쓰고 쌓아올린 구조 자체가 사실은 거대한 위험의 체계 위에 가설됐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현대사회의 안전과 위험문제는 산업혁명 이래 근대적 합리화 과정 전반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향후의 발전방향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요구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 책에서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추구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위험사회로서 현대 산업사회의 위험성은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현대의 위험은 방사선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인 지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 둘째,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위험의 분배와 성장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즉 위험의 사회적 지위가 나타난다. 셋째, 위험의 확산과 상업화는 자본주의의 발전논리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대신에 자본주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다. 넷째, 부는 소유할 수 있지만 위험으로부터는 그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다섯째, 사회적으로 공인된 위험은 특수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닌다. 지금까지 비정치적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정치적인 것으로 변한다.

현대사회가 위험사회라는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벡이 주장하는 성찰적 근대화란 이처럼 ‘풍요사회’를 향한 근대화의 과정이 ‘위험사회’로 귀착되는 과정을 되짚고 반전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원리들 자체를 성찰하여 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산업사회의 진보이자 해체의 과정, 이것이 성찰적 근대화의 과정이다.

결국 성찰적 근대화란 현대 기술과학의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 한계도 함께 인식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을 높이는 과정이다. 이를 벡은 칸트의 명제를 빌려와 이렇게 표현한다.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

2008년 방한한 벡은 “오늘날 나타나는 근대화의 위험은 국민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지구적 차원의 위험”이며, 국민국가 내부에서는 드러날 수 없는 모순들이 세계적 차원에서 드러나면서 세계주의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고 밝혔다. 지난 시대부터 지금껏 빈곤은 위계적이었지만, 스모그는 만인에 평등하다. 스모그는 환경문제와 생태위기 등을 포괄한다. 위험사회란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를 이룩한 근대 산업사회의 원리와 구조 자체가 파멸적인 재앙의 사회적 근원으로 변모하는 사회다.

30여 년 간에 걸친 군사독재 아래서 위험과 안전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오직 외형적인 성장만을 개발과 발전의 지표로 삼은 ‘폭압적 근대화’의 길을 치달려 온 한국 사회에서 그의 설명력은 실질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험사회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성찰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성찰이 불가능하다. 성찰이 가능했다면 4대강 사업이라는 ‘초강력 울트라 사기질’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며, 성찰이 가능했다면 이번 세월호 사고를 비극적인 참사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진정한 위험사회는 성찰이 불가능한 사회, 성찰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다.

 벌써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종북이니 폭도니 하고 몰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들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역사란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도 역시 지배하는 장치로 전락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숭고함의 근원은 잠재적인 모순들을 은폐하지 않고 자체 내에서 철저히 극복하려는 욕구와 동일하다.’(아도르노)” 지금의 한국 사회는 벡이 말하는 포스트 산업사회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원시적 위험사회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세월호 안에 갇혀 숨져간 꽃다운 넋들 앞에서 우리의 애도는 숭고한 슬픔이 아니라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거짓 화해, 헛된 기억의 유적일 뿐이다.
 
 
 





[책 속의 길] 123
김윤곤 / 시인. 한국일보 <엠플러스한국>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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