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교육'을 들여다보며 느끼는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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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아이들 미래가 걱정되면 오늘 우리 시대와 삶을 들여다보라


 수능위주의 경쟁교육, 물질만능 약육강식의 사회,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차별의 고착화는 어른과 아이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기본적 병폐에 더해 97년 외환위기는 한국 사람들을 ‘살아남는’ 것에 올인하게 했다. 중소기업은 무너지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하고, 실업자와 노숙자는 늘어났다. 한 마디로 ‘돈 없는 삶’과 ‘돈 적은 삶’의 처참함과 비루함을 전사회적으로 목격했다. 이 모든 과정에도 ‘대기업’은 호의호식했고 소위 ‘사’자 붙은 전문직종 사람들은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공무원은 철밥통을 지켰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부모들은 자식들의 미래를 불안해하면서 ‘대기업’과 ‘전문직종’을 자기 아이들의 꿈으로 주입했고 여의치 않을 경우 ‘공무원’의 ‘안정성’을 강조한다. 엄청난 갑부이거나 확실한 ‘빽’이 있지 않는 이상 누구도 이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대기업’에 가기 위해서도 ‘전문직종’이 되기 위해서도 학벌위주의 한국사회는 ‘SKY서성한중외경시’ 또는 최소한 ‘in 서울’ 대학을 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고통중의 하나인 ‘돈 없는 삶’과 ‘돈 적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한, 남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시작된 1등 경쟁은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
 아이는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가장 축복받는 존재다. 대체로 아직까지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좋은 대학을 가라는 요구는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부모들의 간절한 바람은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확인하고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아이들이 ‘말’을 하고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른들의 잠재된 ‘욕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 아이들은 자신이 내뱉은 의미없는 말과 끄적거린 그림으로 인해 한 두 번쯤 부모들로부터 ‘천재’이거나 ‘영재’임을 의심당하기도 한다. 영유아 때부터 각종 사교육들이 난무한다. 우리말도 모르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한문을 가르친다. 대체로 많은 아이들이 ‘영재’와 ‘천재’가 아님을 부모로부터 인증받는다. 부모들은 내 아이의 어딘 가에 있을지 모르는 천재적 재능을 찾기 위해 예체능 학원을 보내며 아이의 재능을 스캐닝 한다. 그래도 아이들이 어린이집 유치원을 다니는 시기까지는 놀이에 시간을 많이 보내며 ‘해’와 ‘달’과 ‘별’에 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부모의 ‘불안’은 자신들의 선택가능한 방법인 초중고 12년 동안 수능을 준비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으로 정리된다. 모두가 그 길 말고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영어는 읽기와 쓰기가 모두 가능해야 하며, 수학은 기본개념에 충실하며 복합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체력이 달리면 안되고 음악 미술 등의 예능적 소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영어 1개, 수학 1개, 예체능 1개를 기본으로 학원을 다닌다. 아이 하나에 못해도 50-60만원 둘이면 100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나마 초등학교니까 이렇다. 학교는 아침부터 아이들을 맡아 공부시켜주고 점심 급식을 주고 최근에는 저가의 학교 방과 후 학교를 진행한다. 공교육의 현실을 잘 아는 부모들은 학교에 큰 바램이 없다. 내 아이가 ‘왕따’, ‘은따’,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시험은 학교에서 치고 성적을 알려주니까 학교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다. 담임선생님을 잘 만나면 다행이고 잘 못 만나면 그 해 고생하게 된다. 초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사교육과 엄마의 매니지먼트는 아이들의 ‘질문’을 없애 버린다.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풀려면 속도를 높여야 한다. ‘정답’을 맞추기 위해 개념과 원리를 충분히 설명 듣고 이해해야 한다. 빠른 아이도 있고 느린 아이도 있다. 그러나 ‘성적’은 느린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이들의 생각보다 정답을 말하게 하고 정답을 찾게 하고 정답을 빨리 찾고 말하게 한다. 남들보다 더 빨리 배워야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며 남들보다...남들보다...앞서 나가야 한다.

 이렇게 초등학교를 거친 아이들은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의욕’이 없어진다. 초등학교부터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으로 실려 다니며 공부하는 공간에 존재했던 아이들이다. 배움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이라는 엔진이 기능하지 않는다. 쏟아 부은 시간이나 양만큼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이 아이들은 모두 공부를 잘 해야 되지만, 공부하는 공간에서 듣기만 하고 공부하지 않았던 아이들은 그 시간을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었거나 억지로 버텨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공부’와 그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들에 대한 ‘반항심’은 스스로를 무기력으로 몰아넣는다. 중학교에서는 성적에 따라 상중하를 ABC로 나누고 분리하여 가르친다. A반으로 간 개똥이를 C반에 있는 소똥이가 부럽게 쳐다본다. 국영수 과목별로 ABC를 오가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인생을 A, B, C로 서열화한다. 공부를 잘하고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와 공부를 못하고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가 갈린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고등학교는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1만 시간 정도 어떤 일에 노력을 기울이면 그 일에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논란의 여지는 많다. 그런데 한 인간이 하기 싫은 일을 1만 시간 정도 한다면 또는 버텨 낸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질 것이고 마음의 병이 생겨 다양한 증상으로 표출 될 것이다. 한국사회의 많은 청소년들은 자기가 하기 싫은 공부를 하기 위해 앉아서 1만 시간을 버텨내고 대학에 가게 된다.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아이들은 학교를 스스로 떠나거나 강제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도 그들의 ‘버티기’와 ‘견디기’는 끝이 아니다. ‘좋은 대학’가기 미션을 완수한 아이들도 실패한 아이들도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기 때문이다. 2차 미션은 스펙 쌓기와 학점관리를 통한 취직하기이다.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를 걸고 재학생, 휴학생, 취업준비생과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한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다.

 자기소개서에 한 줄을 적기 위해 ‘봉사’를 하러간다. 그것도 누가 알아주지 않는 봉사여서는 안되어서 캄보디아 아프리카 등 대기업이 주관하는 ‘봉사활동’에 높은 경쟁을 뚫고 들어간다. 봉사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애씀‘이라는 뜻이다. 학생들이 자신을 돌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봉사‘는 진정한 ’봉사‘일까? 원하는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쓴다. 최대한 자신을 진취적이고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존재로 표현해야 한다.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쓰면 떨어진다. 자기소개를 하라고 해서 진짜 자기소개를 하면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취업준비생들은 궁금해 한다. 그 기업은 어떤 자기소개서를 좋아하느냐고? 내가 나를 소개하는데도 기업의 정답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나를 버리고 나를 없애고 내게 돈을 주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헌법으로 보장된 국민의 권리다. 위에서 언급한 얘기들을 들으며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가? 공허하다. 아이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기쁨이나 만족감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무엇을 새롭게 해서 행복하기보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행복한 상황이 될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에 나온 졸업생은 이렇게 말한다. “내 스스로의 행복을 정립하기도 전에 모두가 쫓아가는 행복을 위해 내 것이라 믿으며 열심히 경쟁속으로 달려갔다”고 말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지금 ‘참고 버티기’를 주문하고 미래의 ‘잘 먹고 잘살기’를 꿈꾸게 한다. 지금 잘 참고 잘 버틴다고 모두가 잘먹고 잘살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 오로지 ‘공부’와 ‘성적’중심으로 진로를 계획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가장 예쁜 시절에 행복하지 않은 것을 견디며 생기는 마음의 병은 미래의 편안함으로만 치유되지 못할 것이다.

 최근에 한 대학생과 인터뷰를 했다. 대학생활, 대학의 역할 등에 질문을 했다. 현재 대학이 취업양성소로 전락한 모습에 대해서 비판적인 얘기했다. 마지막 질문을 했다. 새내기들이 여기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선배로서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냐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더니 “그래도 열심히 스펙 쌓으라고 얘기해줄래요.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인터뷰를 하며 내가 예상한 그 대학생의 답은 “자기를 찾고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대학생활이 되었으면 좋겠어요”이었다. 틀렸다.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은 여전히 이 무한경쟁질서에서 이탈해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삶이 있고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닫았다. 그것은 다른 삶을 보고 살아온 나의 얘기일 뿐이었다.

 ‘행복’을 뒤로하고 ‘자기’를 잃어버린 시대의 아이들이 성장해서 어떻게 될까? ‘더불어 함께’가 파괴된 괴물이 되어버린 시대에, 내가족 내 자식으로 무장한 이기적 어른들이 또다른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공부를 해도 불안하고 안해도 불안하다는 다수의 대학생들을 보며 내가 하는 조언이란 것은 멈추라는 것이다. 생활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고 ‘경쟁’으로 흐르는 삶의 방향을 잠시 멈추고 ‘토익’공부하듯이 스펙을 쌓듯이 자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알고 찾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탐구하고 연구하라는 것이다. 20대에 잃어버린 ‘자기’를 찾지 않으면 언제 찾겠는가?

 한국사회 한국교육 속에서 겪는 20대와 청소년들이 겪는 아픔은 시대의 산물이고 명백히 어른들의 잘못이다.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이라면 오늘 우리 시대가 직면한 문제와 당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양심을 가진 어른들의 할 몫이다.






[오택진 칼럼] 25
오택진 / <연구공간Q+> 대표.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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