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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대구 '가창골', 65년만에 첫 유해발굴 작업

기사승인 2015.03.12  22: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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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유족회 등...주민 증언 따라 달성군 옥분리서 합동제례 뒤 첫삽 "찾을 때까지 계속"


 
 
▲ 대구시 달성군 가창지역 첫 유해발굴 작업을 하는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2015.3.1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10월항쟁, 국민보도연맹사건 등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학살이 일어난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에서 65년만에 처음으로 유가족과 시민단체가 희생자 유해발굴 작업에 나섰다.

'대구10월항쟁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10월항쟁유족회)'와 '대구작가회의' 등 20개 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가창골지역 유해발굴단>은 11일 아침부터 대구 달성군 가창면 옥분리 등자골에서 10월항쟁과 보도연맹 사건으로 당시 희생된 이들의 유해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1950년 사건 발생 이후 65년만에 처음으로 대구 가창골에서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된 셈이다.

 
 
▲ 노용석 박사와 유족들이 유해발굴을 하는 모습(2015.3.1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같은 사건의 희생자가 묻힌 경산코발트광산은 2007년부터 정부차원의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돼 이미 80여구는 광산 인근 컨테이너 박스에, 420여구는 충북대학교 등에 임시보관됐다. 지난 1일 대전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 옛 산내면 골령골에서도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돼 모두 18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후 이 사건을 맡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진실화해위)'의 모든 활동이 종료되고 예산도 배정되지 않아 유해발굴은 민간차원에서만 간신히 이어져오고 있다. 때문에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최대 민간인 학살터'로 알려진 가창골에서는 유해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 가창지역 유해발굴 추정지를 가리키는 고희림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2015.3.1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이에 따라 10월항쟁유족회와 시민단체는 더 이상 유해발굴 작업을 늦출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아 지난해 말 가창 유해발굴을 위한 민간단체를 꾸리고 가창일대 주민들을 상대로 자체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최근 당시 마을주민들의 증언이 이어져 이를 바탕으로 가창면 옥분리서 발굴 작업을 하게 됐다.

발굴 첫 날인 11일 유가족과 시민단체 활동가,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30여명의 발굴단은 당시 사건을 기억하는 주민 증언을 토대로 가창면 옥분리 야산에서 첫 유해발굴을 시작했다. 아침 9시부터  이들은 삽과 곡괭이, 밧줄 등 각종 장비를 들고 산을 올랐다. 시신이 묻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자리를 잡고 장비를 정비했다. 유해발굴은 노용석(전 진실화해위 유해발굴팀장)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인류학박사와 송장건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강사 주도로 진행됐다.

 
 
▲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회장이 합동제례에서 분향하는 모습(2015.3.1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발굴에 앞서 참가자들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합동제례를 올렸다. 채영희(71) 10월항쟁유족회 회장은 "65년만에 아버지를 찾으러 와 너무 죄송하고 가슴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렸다. 나정태(69) '한국전쟁전후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희생자유족회 이사는 "아버지요, 어머니요. 아들과 딸들이 왔습니다. 65년만에 왔습니다. '여기 한번 파보소. 바로 여깁니더'라고 마을 어르신께서 말하는데 어떻게 안파보겠습니까"라며 "가창골 헤메다 이제 왔는데 오늘 안계셔도 만나뵐 때까지 온 힘 다하겠습니다. 이제 첫삽 뜹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찾을 때까지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합동제례 뒤 낮부터 발굴작업은 시작됐다. 오후 1시부터 크레인도 동원됐다. 3시간 가량 2m의 흙을 파냈지만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발굴단은 오후 5시쯤 첫날 작업을 마무리하고 산을 내렸왔다. 이후 발굴단은 주민들의 증언을 좀 더 수집해 같은 곳에서 다음주 2차 발굴을 하기로 결정했다.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이 유해발굴에 앞서 합동제례를 지내고 있다(2015.3.1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노용석 박사는 "주민 증언과 인적이 드문 지형지물 특성상 유해가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며 "첫날 발견되지 않아도 유족이 포기하지 않고 발굴 작업을 이어간다면 발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특히 "차가 1대 왔다면 최소 20구, 2대 왔다면 50여구 이상이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가능성이 적어도 증언이 있으니 발굴작업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가에 희생된 민간인 유해를 찾는 것은 국가의 의무로 정부 지원도 필요하다"며 "유가족에게만 맡겨선 안된다"고 했다.

함종호 10월항쟁유족회 자문위원은 "유해발굴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누구도 포기해선 안된다"면서 "국가 폭력에 희생된 국민을 국가는 포기했지만 유가족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민간차원에서라도 발굴을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희림 10항쟁유족회 자문위원도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이승만 정부의 최대 민간인 학살터가 대구 가창골"이라며 "대구시와 달성군도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유족에게 도움을 달라"고 했다.

 
 
▲ 유해발굴터에서 천막을 치고 발굴현장을 지켜보는 유족들(2015.3.1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한편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에 따르면, 10월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보도연맹에 강제가입돼 경찰의 주요 사찰대상이 됐다. 이 가운데 좌익정치범으로 몰려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집단적으로 학살되기도 했다. 특히 대구에선 50년 6~9월에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앞산빨래터, 학산공원, 신동재, 파군재 등에서 학살이 집중된 것으로 유족회는 보고 있다. 대구형무소 수감된 재소자 2~3천여명과 전국 각지에서 잡혀온 보도연맹 관련자 5~8천여명 등이 이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0월항쟁은 당시 미군정 식량정책 실패 때문에 발생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민들은 노동자파업에 대한 경찰발포로 노동자 2명이 숨지자 이에 분노해 다음날 시청에서 기아데모(굶주린 부녀자들이 쌀을 달라고 하는 시위)를 했다. 대구역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대치하다 십수 명 사살됐다.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pnnews@pn.or.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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