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특별법으로 진실 밝혀야"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5.05.1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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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계류 3년째...대구10월항쟁·보도연맹·가창골유족회 '백만 서명운동ㆍ유해발굴'


"이 나이 먹도록 아버지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요. 잊을 수가 없어요"

대구보도연맹유가족회 부회장 김영호(66)씨는 18일 이 같이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2살이던 1950년 7월 8일 국민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생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아버지가 갈 만한 장소를 샅샅이 찾았다. 그러나 같은 달 30일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가창골에서 학살됐다는 신문 보도에 김씨 아버지 이름이 나왔다. 벌써 65년 전 얘기다.

김씨는 "그때는 좌우, 여야가 어디있습니까. 정부가 보도연맹에 가입하라니까 평범한 시민들이 가입했어요. 그런데 빨갱이라고 죄 없는 아버지를 국가가 끌고간거에요"라며 "뒤늦게 진실이 밝혀지면 뭐합니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요. 곁에 돌아올 수 없죠"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때문에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을 찾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면서 "국가폭력의 진실은 국가가 반드시 밝혀야 한다. 특별법 제정이 그 시작일 것"이라고 했다.

대구10월항쟁유족회 채영희 회장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모습(2015.5.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10월항쟁유족회 채영희 회장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모습(2015.5.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채영희(71) 대구10월항쟁유족회 회장도 같은 날 "청산하지 못한 역사로 구천을 떠도는 원혼과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국민이 있는 한 이 같은 역사는 과거가 될 수 없다"며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치유할 특별법을 빨리 제정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대구경북유족회'는 18일 대구2.28공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유족회에는 10월항쟁, 국민보도연맹사건,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 3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유족회는 이날 기자회견 후 2.28공원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 서명운동은 앞서 14일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시작됐다. 오는 20일에는 서울역에서 전국 유족회와 기자회견을 연다. 이어 대구 등 전국에서 서명운동을 벌여 1백만인 서명이 모이면 국회에 서명지를 전달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대구경북유족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2015.5.18.대구2.28공원)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대구경북유족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2015.5.18.대구2.28공원)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또 이들은 서명운동과 함께 10월항쟁, 보도연맹사건, 가창골 등 대구지역 미신고 유족을 찾는 활동도 하고 있다. 이미 지난 8일 대구 9곳에 '유족을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어 대구형무소와 가창골 희생자의 미등록 유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들은 매주 주말 현수막을 게재해 미등록 유족 찾기를 이어간다.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효목동 옛 대한중석광산에서 지난 3월에 이어 3차 유해발굴도 한다.

유족회는 "국가에 의해 아버지는 빨갱이로 몰려 죽고 자녀들은 연좌제로 묶여 66년 세월동안 숨도 못 쉬고 살아 왔다"며 "국가폭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식들은 이제 늙어가고 있어 진실규명을 기다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더 늦기전 특별법을 만들어 중단된 과거사 조사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특별법에는 ▶진상규명 ▶희생자에 대한 배상·보상 ▶명예회복 ▶유해발굴 ▶추도사업 ▶재발방지▶가해자에 대한 적절한 법·정치·화해 조치 ▶추도사업·사료관 운영 등을 수행할 재단 설립 등이 포함돼야 한다"며 "3년째 국회에 잠자고 있는 특별법 제정은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2.28공원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하는 시민들(2015.5.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2.28공원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하는 시민들(2015.5.18)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한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에 따르면, 10월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보도연맹에 강제가입돼 경찰의 주요 사찰대상이 됐다. 이 가운데 좌익정치범으로 몰려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집단적으로 학살되기도 했다. 특히 대구에선 50년 6~9월에 가창골, 경산코발트광산, 앞산빨래터, 학산공원, 신동재, 파군재 등에서 학살이 집중된 것으로 유족회는 보고 있다. 대구형무소 수감된 재소자 2~3천여명과 전국 각지에서 잡혀온 보도연맹 관련자 5~8천여명 등이 이곳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0월항쟁은 당시 미군정 식량정책 실패 때문에 발생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민들은 노동자파업에 대한 경찰발포로 노동자 2명이 숨지자 이에 분노해 다음날 시청에서 기아데모(굶주린 부녀자들이 쌀을 달라고 하는 시위)를 했다. 대구역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대치하다 십수 명 사살됐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2005년부터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0년 7~8월까지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에 의해 민간인 3천여명이 경산코발트광산 등에서 집단사살됐다. 주로 경산과 청도의 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수감자들로 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협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희생됐다.

과거사위는 "명백한 불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가창골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민간인 2천~3천여명이 집단사살됐다고 보고서에 나왔다. 10월항쟁은 이름이 확인된 희생자만 204명에 이른다. 이후 정부와 시민단체 유족들은 6차례에 걸쳐 유골 5백여구를 발굴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로 정권 교체 후 과거사위 활동은 중단됐고 예산지원도 끊겨 진상규명 작업은 모두 중단된 상태다. 새정치민주연합 이낙연 의원이 지난 2012년 처음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했지만 3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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