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우리는 과연 축하받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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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ㆍ배봉기, 잊혀지는 항일희생자...'15억 불꽃잔치'보다 기억과 다짐을


광복 70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곳곳에서 경축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14일 서울광장에서는 전야제가 열리고 15일에는 정부차원에서 중앙 경축식과 국민화합 대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독립기념관도 광복을 주제로 한 특별공연을 준비하고 있으며 국가보훈처와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공동주최로 '광복70년 경축음악회'를 겨레의 큰 마당에서 '함께하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열 계획이라고 한다. 자치단체들도 다채로운 경축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대구시 역시 기념음악회, 불꽃쇼, 시민희망대합창 등 시민이 참여하는 광복 7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14일 오후 8시부터 수성못에서 열릴 예정인 불꽃놀이는 15억 상당의 규모로 준비되고 있다고 해 주목을 끌고 있다.

<영남일보> 2015년 8월 7일자 1면 / <매일신문> 8월 5일자 1면
<영남일보> 2015년 8월 7일자 1면 / <매일신문> 8월 5일자 1면

 광복 70년을 맞아 준비되고 있는 대규모의 경축행사에 대해 한편으로 씁씁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쩐일일까? 그것은 아마 우리의 광복 70년의 현실이 단지 축하만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지난 70년 우리는 분단과 전쟁을 딛고 일어나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여전히 가야할 길이 많지만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이룬 몇 안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70년 대한민국이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도성장으로 질주하는 동안 우리가 놓치거나 잊어버린 것은 없나라고 물었을때 ‘없다’라고 자신있게 답변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 2015년 8월 12일자 1면
<한국일보> 2015년 8월 12일자 1면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사실

한국일보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리서치와 함께 실시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 모임인 광복회 회원들의 생활실태 조사에 따르면 월 개인 소득 200만원 미만 구간에 전체 75.2%가 몰려 있었다. 개인 총 재산 역시 국민 평균을 한참 밑돌아 5,000만원 미만이 28.3%, 5000만원 이상 1억원 미만이 21.1%로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2013년 국민대차대조표 작성 결과’에서 나타난 우리나라 가구당(2.61인 기준) 순자산(3억 3,085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가 대부분이었다.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재산과 목숨을 바쳐 항일운동에 나섰지만 해방된 조국은 이들의 공적을 제대로 평가하고 대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허형식, 배봉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경제적 어려움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것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져 간다는 것이다.

중국 심양 '918박물관'의 허형식 사진 / 사진 제공.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중국 심양 '918박물관'의 허형식 사진 / 사진 제공.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의병 허필의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한 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참모장을 역임한 허형식을 기억하는 남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민주화가 되었지만 남쪽에서는 사회주의라는 이념 때문에 배척당하고 북에서는 김일성 항일유격대 출신이 아니라서 배제된 이들은 광복 70년의 세월동안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진 인물들이다. 허형식도 그들중 한명이다. 어쩌면 만주벌판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쓰러져간 수많은 항일전사들이 있을 것이다.

1991년 10월18일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에서 숨진 배봉기라는 위안부 할머니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거의 없을 것이다.  배봉기(1914~1991) 할머니는 한반도 출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밝힌 인물이다.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 나온 것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1991년 8월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이 이뤄지기 무려 16년 전의 일이다. 배할머니는 1943년말 오키나와 본섬이 아닌 도카시키섬으로 배치돼 ‘빨간 기와집’이라 불린 일본군 위안소에서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한겨레> 2015년 8월 8일자 1면
<한겨레> 2015년 8월 8일자 1면

그는 종전 이후 위안부 생활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내다 1972년 5월 이뤄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로 인해 강제로 위안부 생활을 공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해야 추방당하지 않을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배할머니는 1991년 10월 18일 숨을 거두었다. 배봉기 할머니처럼 종전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을 거둔 이름도 확인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축하보다 기억, 그리고 다짐

 그래서이다. 광복 70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축하가 아니라 기억일 것이다. 15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불꽃잔치보다 필요한 것은 항일운동가들의 후손에 대한 존중과 배려일 것이다. 그리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광복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강제동원된 위안부 할머니들, 강제동원되어 노역을 했던 이들을 위로하고 잔한잔 바치는 일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제기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요구를 죄송스러워 하는 박근령씨와 같은 이들의 일제식민시기에 대한 기억과 투쟁하는 일일 것이다.

 추위와 배고픔속에서도 조국을 찾겠다는 의지만으로 일제에 맞섰던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한 끝내 광복 70년 경축행사를 함께 하고 있지 못하는 분단과 대결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성찰과 극복하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김두현 칼럼]
김두현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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