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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골ㆍ코발트광산...역사의 '비극'을 떠올리다

기사승인 2015.08.17  10: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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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문학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터 답사..."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열린 2015년 8월 15일, 대구시 달성군 가창골의 가창댐 앞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묵념을 했다. 가창골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빨갱이'로 몰려 민간인 1만여명이 국가에 의해 집단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1959년 댐이 만들어지면서 비극의 역사는 묻혀버렸다.

지난 15일 시인, 화가, 학생 등 시민 20여명은 '10월 문학회'가 주최한 '10월항쟁 답사'를 떠났다. 이들은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터로 알려진 대구 가창댐 수변공원과 경산 코발트광산 일대를 오전 10시부터 5시간가량 답사하며 희생자를 추모했다.

10월 문학회 고희림 시인은 "가창골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곳인데, 그 당시 유족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유해를 밤에 몰래몰래 인근의 산으로 옮겨 안장시켰다"며 "가창댐 주변 산속 깊은 곳에 유해들이 많이 묻혀있는데 개인 사유지라서 깊게 땅을 파 볼 수 없는 현실"이라고 했다.

 
 
▲ 10월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터를 돌아보는 '10월항쟁 답사'. 고희림 시인이 '가창골 학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2015.8.15.가창댐)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가창댐 입구 안내판에는 '댐의 맑은 물과 수려한 산이 어우러진 자연풍경을 즐길 수 있는 드라이브코스'라는 설명이 눈에 띄었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지난 65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학살'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고희림 시인은 "대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어 더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억울한 혼을 달랠 수 있도록 우리가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시각, 답사팀은 경산코발트광산 제2수평갱도 입구에 도착했다. 두꺼운 철문을 열자 컴컴한 어둠과 함께 한기가 밀려 나왔다. 이 곳에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 2천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경북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 (2015.8.15)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최승호 경산신문사 대표는 "코발트광산은 일제강점기 지하자원 수탈과, 한국전 당시 민간인 대량학살 현장이라는 두 가지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최 대표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은 강력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서 코발트를 채광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져갔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 동원돼 금과 코발트를 캤고, 노동 착취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빈번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자 코발트광산은 폐광됐고 한국전쟁 발발 후 경찰과 군인은 이곳에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고 매장시켰다.

20년째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을 벌이고 있는 최 대표는 "1945년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은 10월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시키고,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쌀과 비료포대 등으로 가입을 권유해 대략 43만명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며 "경산, 영천, 청도 지역에 보도연맹 참여자수가 많은 이유는 10월 항쟁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광산 안으로 들어가자 허리도 펼 수 없는 좁고 축축한 굴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굴 양옆으로는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된 유해발굴과정에서 나온 흙주머니가 곳곳에 쌓여있었다. 흙속에 뼈와 치아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추후에 흙을 말려 유해를 보존하기 위해 버리지 않고 모아둔 것이다. 흙 한줌도 쉽게 버릴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저 쌓아둘 밖에 방법이 없다.

 
 
▲ 경산코발트광산 제2수평갱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웅덩이 아래 수백구의 유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5.8.15)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입구에서부터 레일을 따라 105m정도 들어오니 제2수평갱도가 나타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르스름한 물웅덩이 밑에는 수백구의 유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최 대표는 "광산 위에서 민간인을 사살하고 수직갱도를 통해 시신을 바로 떨어뜨린 것으로 보인다"며 "나중에 시신이 발견될 것을 염려해 광산을 폭파시켰기 때문에 유해들이 대부분 조각나 있다"고 했다. 이어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답사에 참가한 명세진(27)씨는 "코발트 광산의 한기를 느끼면서 그동안 내가 너무 더위 속에서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장 어떤 성과를 낼 수는 없어도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 경산코발트광산 입구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그동안 발굴된 80여구의 유골이 임시 보관돼있다. (2015.8.15.) / 사진.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경산 코발트광산은 지난 2007년부터 3차례에 걸쳐 국가차원의 유해발굴이 이뤄졌다. 지난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했다. 이후 전국 13곳에서 민간인 학살터 유해발굴이 진행됐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모든 발굴이 중단됐다. 그나마 경산코발트광산은 지난 2013년 경산시가 예산을 지원을 받아 현장보존과 진입로 개설, 폐갱도 안전도 검사 등이 이뤄졌다. 올해 대구에서는 10월항쟁유족회가 가창골에서 발굴작업을 했지만 유해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발표한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 1,800여명은 북한군에 협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1950년 7월부터 8월 중순경까지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사살되었다.

이에 대해 과거사위는 "민간인 학살은 불법"이라고 결론 내리고,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과거사위의 활동은 중단됐고 정부차원의 민간인 학살 진실규명과 유골 발굴 작업은 모두 멈춰있는 상태다. 

한편, 10월문학회는 오는 9월 6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과의 만남' 행사를 진행한다. 

평화뉴스 박성하 인턴기자 pnnews@pn.or.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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