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추위에...대구역 노숙인들의 긴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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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이 다 들어가야 우리가 눕지. 저렇게 밝은데서 우째 자노..."


낮 동안 텅 비었던 공터에는 해가 질 무렵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이들이 삼삼오오 나왔다. 7시가 되자 어느덧 60여명이 줄을 서있었다. 안면이 있는 이들은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나눴고, 대다수는 바닥을 보며 말없이 기다렸다. 기다란 줄 앞에는 시계, 물통뚜껑, 신문 등 물건들이 사람을 대신해 줄을 서기도 했다.

몇 일째 낮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계속되는 22일 저녁 대구역 뒷편 노숙인 무료급식소. 많은 사람들이 매서운 추위에 두툼한 점퍼와 모자, 마스크까지 둘둘 감싸고 한 끼를 기다렸다. 네 번째로 줄 서있던 한 청년은 "다섯 번째 사람부터 사진 찍어주세요"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저녁 7시30분, 줄서서 배식을 받는 사람들(2016.1.22.대구역 북편광장)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저녁 7시30분, 줄서서 배식을 받는 사람들(2016.1.22.대구역 북편광장)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매주 금요일에 무료급식 봉사를 하러 오는 파티마병원 직원들과 수녀들 (2016.1.22.대구역 북편광장) / 사진.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매주 금요일에 무료급식 봉사를 하러 오는 파티마병원 직원들과 수녀들 (2016.1.22.대구역 북편광장) / 사진.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10분 후, 테이블 뒤로 음식을 실은 트럭과 봉사자들이 탄 승용차가 들어섰다. 이날은 파티마병원에서 밥과 배춧국, 불고기, 김치 등을 준비해왔다. 요일마다 정해진 단체가 와서 무료급식 봉사를 한다. 병원 직원 3명과 수녀 3명이 가져온 음식을 트럭에서 내리고 배식 준비를 했다. 음식냄새가 풍기자 광장 끄트머리에 있던 이들도 하나둘씩 줄을 섰다. 배식과 식사, 정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한겨울에는 설거지가 힘들어 일회용 그릇에 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쟁반에 국과 밥을 만 그릇과 반찬이 담긴 작은 접시를 받았다. 영하의 추위가 몸을 시리게 하는 겨울 밤, 쟁반을 들고 벽에 기대서거나 쪼그려 앉아 들이켰다. 130여명이 저녁식사를 끝낸 시각은 채 8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흩어졌다.

쟁반을 받아 벽에 서서, 쪼그려 앉아서 저녁을 먹는 사람들 (2016.1.22.대구역 북편광장)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쟁반을 받아 벽에 서서, 쪼그려 앉아서 저녁을 먹는 사람들 (2016.1.22.대구역 북편광장)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20년째 대구역에서 무료급식 봉사를 하는 이창우(75)씨는 "요즘은 날이 추워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다.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적게 왔다"고 말했다. 국을 나눠주던 한 자원봉사자 역시 "매일 200인분을 준비한다"며 남은 그릇과 수저를 세어보더니 "오늘은 130여명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매일 이 일을 하다보면 좋은 소리도 못 듣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둘까를 고민하기도 한다"면서도 "하루를 끝내고 오늘도 한 끼를 먹였다는 생각을 하면 잠이 잘 온다. 그 힘으로 20년동안 이 일을 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대구역 무료급식소는 자율방범대에서 운영하다가 중단되고, 2년전부터 수성구의 한 교회 봉사단에서 다시 하고 있다.

매일 저녁 대구역 급식소를 찾아 밥을 먹고 일손을 돕는 60대 김씨를 만났다. 그는 얼마 전까지 공사장에서 일을 했지만 날이 추워지면서 일자리도 없고 다리도 아파 요즘은 폐지를 줍는다. 따뜻한 밥 한 끼가 고마워 세 달 전부터 종종 쌀 씻는 일이나 청소를 돕고 있다고 한다. 수고비는 담배 한 갑이나 5천원정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던 그는 인근에 있는 임시보호쉼터로 향했다.

밥을 먹은 이들은 따뜻한 곳을 찾아 대구역 지하도에서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 8시 백화점 판매대에서 영업을 하고 있고 많은 상점이 열려있는 시각, 빵집 앞 벤치에 앉아있던 한 50대 남성은 "여기 사람들이 다 들어가야 우리가 눕지. 저렇게 밝은데서 우째 자노..."라며 가게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이들의 긴 겨울밤은 이제 시작이다.

밤 11시40분, 인적이 드문 반월당역 지하도에서 앉아 잠을 청하는 사람들(2016.1.22.반월당역 지하도)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밤 11시40분, 인적이 드문 반월당역 지하도에서 앉아 잠을 청하는 사람들(2016.1.22.반월당역 지하도)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밤 10시 50분 반월당역 지하도. 한 60대 남성은 구부정한 걸음으로 따로 보관해둔 스티로폼 판자를 찾아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 자리를 폈다. 이미 서너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좋은거 구했데이", "잠 잘 오겠네"라며 하룻밤 이웃이 된 이들은 짧은 대화를 나누다 눈을 감았다.

30분 뒤 반월당역 지하도. 막차를 타기 위해 분주한 가운데 벤치에 앉아 불편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둥에 기대 눈을 감고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주위가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이들은 젊은 축에 속하는 40대 중년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했다.

자정 무렵, 벤치에 앉아있던 한 60대 남성은 "이제 갈거예요"라고 말했지만 어디 가느냐는 물음에 "갈 데가 어디 있어요"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다들 빛바랜 점퍼와 낡은 운동화, 모자, 귀마개로 꽁꽁 싸매고 몸을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그들은 지친 표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밤 12시 30분, 반월당역 지하도 계단에 누운 노숙인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밤 12시 30분, 반월당역 지하도 계단에 누운 노숙인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권용현(43) 대구노숙인종합지원센터 사무국장은 "대구역와 동대구역은 난방이 안돼 겨울에는 사람들이 없다. 요즘은 쉼터를 이용하거나 좀 더 따뜻한 반월당역 지하도에서 많이 잔다"고 전했다. 박만원 대구시 복지정책관의 말에 따르면 대구시가 파악한 거리노숙인은 140여명, 센터에 등록된 노숙인은 120명 정도다. 그러나 이는 제 3자가 신고한 것으로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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