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의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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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열 / 『혐오사회』(카롤린 엠케 저 | 정지인 역 | 다산초당 | 2017)


  "존경과 인정이 타인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듯이, 멸시와 증오는 대개 타인에 대한 오해를 전제로 한다. 또한 증오의 경우에는 그 감정의 원인과 대상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혐오사회> 중에서)

  지난 여름, ㄱ시 도심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회판이 벌어졌다. ㄱ시 출신의 대통령이 저지른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나 탄핵됐고, 또 구속되면서다.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 모임이었던 ‘각사모’(각하를 사모하는 모임)는 ㄱ시가 고향인 만70세 이상 남녀를 회원으로 두고 있었다. 이들은 국기를 양 손에 든 채 집회장에 나타나기로 유명했다. 애국심이라는 정체성은 이들만의 소유인 듯했다.

  각사모의 앞길을 막거나 비판하면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애써 이들을 외면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은 채 옛 향수에, 또 감정에 사로 잡혀 무논리적인 주장을 앞세우는 각사모를 보면서 회의를 느꼈다.

  급기야 국민 대다수는 ㄱ시에 사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70세 이상 노인들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ㄱ시에서 나고 자란 ㄴ씨(72)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 파병을 자원했을 정도로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지난 선거에서 대통령에게 표를 줬지만, 비리 사실을 알고 나서는 마음을 접었다. 집회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집회장 밖’에 있는 ㄴ씨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어우, 저 각사충”

  "다음 뉴스-ㅂ니다. 어제 오후 5시 3분쯤 ㄱ시 노인종합복지회관에서 ㄴ씨(72) 등 4명이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 3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해 2명이 숨지고 2명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피해자 모두 70세 이상이라는 점에 주목, 특정 단체를 혐오하는 이들의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달아난 남성들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하략)"

  위 사례는 제법 극단적인 편이며, 흔히 벌어지는 혐오사회의 양상과는 사뭇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 물론 현실과 무관한 가상의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증상이 개인감정을 넘어 집단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름’은 ‘틀림’이 되어 증오와 혐오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다름을 이유로 누군가를 멸시하고 적대하는 행위에서, 또 그러한 행위를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태도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공모되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혐오로 인해 사회적 긴장이 계속 높아지면, 언제든 통제하기 어려운 집단적 광기와 폭력으로 번질 수 있다며 경계한다. 책에서 저자는 혐오와 증오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비판한다. 동시에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중략)내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현상은 나와 접촉하는 사람들의 눈이 지닌 특이한 성질 때문에 생긴다."(랠프 앨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중에서)

  2016년 2월 독일 작센주 클라우스니츠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난민이 타고 있는 버스를 막아 세우는 일이 있었다. 버스 안에 있던 난민들은 3시간 넘게 시위대의 고성을 들으며 ‘틀림’의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곳에서의 증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묵인되었다. 혐오사회에서는 증오가 관련 근거를 갖추고 인정받으면서 사회 한가운데에서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인종, 성별, 거주지, 성정체성, 종교관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우리는 혐오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난민들을 말없이 바라만 봐서는 안 된다. 시위대의 목소리는 방관자에 의해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혐오와 증오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유독 공감했다. 혐오에 맞서는 일을 피해자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되며, 함께 책임을 나눌 것을 저자는 대안으로 제시한다.
 
 
 

  증오와 폭력으로 공적인 공간을 채우고, 불법을 자행하는 이들에게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군가가 혐오와 증오에 빠져 위험하지 않은지, 단순히 뜻을 모으거나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이들을 구할 수 있지는 않을지 고민하고 또 행동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에릭 가너(Eric Garner)의 사례도 나온다. 그는 2014년 7월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경찰에 의해 목이 졸려 숨졌다. 세금을 내지 않고 불법으로 담배를 판매한다는 혐의로 몸수색 등을 요구한 경찰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경찰의 추궁이 계속되자, “It stops today”라고 말한다. 수없이 검문당하고 체포당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람이, 영원히 모욕당하고 멸시당하는 흑인의 역할을 태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그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하며 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 에릭 가너와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지난해 2월10일 오후 1시10분쯤 경북 군위군 고로면의 한 주택에서 불이 나자 인근 농장에서 일하던 스리랑카 출신 이주노동자 니말씨(39)는 불 속으로 뛰어 들었다. 나말씨는 생면부지의 조모 할머니(90)를 구했다. 그는 구조 과정에서 머리와 목, 손 등에 2도 화상을 입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주노동자의 본능적인 행동에 크게 놀랐다.

  혐오사회에서 언론은 더욱 치밀해야 한다. 사안을 치열하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 여기서 무게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행위에 실리는 것이 좋다. 행위에서 사람을 배제할 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기레기로 대표되는 언론에 대한 비판이 씁쓸하다.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지만, 기레기가 아니라고 담보할 만한 행동거지를 갖췄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즉답이 망설여진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의 공격수라고 할 수 있는 단체(정당 등)의 편에 서는 언론인들도 많다고 비판한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혐오를 불러온 걱정의 원인과 대상을 냉철하고 정교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원인을 밝혀 정당화할 수 있는 걱정은 정당화하고,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근거가 없는 걱정은 비판하는 것. 중립적인 위치에서 객관성의 칼날을 들이대는 게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가 새삼 깨닫고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책 속의 길] 124
백경열 / 언론인.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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