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의 연속, 삶의 '변수'에 희망 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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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늬 /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축구경기에서 골키퍼가 페널티킥을 막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키커와 골대까지의 거리는 11m, 프로축구 선수들이 페널티킥을 찰 때 공이 이 거리를 날아 골대까지 가는 시간은 0.5초다. 반면 골키퍼가 공의 방향과 높이를 인식하고 몸을 날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초다. 과학적으로만 보면 골키퍼가 키커의 페널티킥을 막을 확률은 0에 가까운 셈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온몸을 휘감는 골키퍼의 불안이 그대로 전해졌다. 표지에 새겨진 뭉크의 그림 <절규>는 제목을 이미지화하며 그 느낌을 극대화했다.

제목만 보면 축구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정작 축구는 주인공의 전 직업으로 언급될 뿐이다.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한때 잘 나가던 골키퍼로, 현재는 대도시의 한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다. 블로흐가 출근한 어느 날 아침,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공사장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본다. 그는 그것을 해고의 표시로 해석하고 아무 말 없이 공사장을 떠난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갈 곳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블로흐, 친구에게 전화를 걸지만 연결되지 않고, 순경에게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다. 현장감독의 눈길을‘해고’로 받아들인 것만큼이나 그는 세상과의 소통에서 단절되어 있다. 그러다 처음 만나 하룻밤을 보낸 극장 매표소 여직원을 갑자기 목 졸라 죽인다.

<그녀는 일어서서 침대로 가 누웠다. 그는 그 여자 곁에 앉았다.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갑자기 그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너무 세게 졸랐기 때문에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공포심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24쪽)

아무 개연성 없는 살인사건을 저지른 뒤 국경 마을로 도망친 블로흐는 본격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살인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 동조도 분노도 할 수 없는 채로 독자들은 역시 불안하게 그의 여정을 따라간다.

<구역질은 멈추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마치 끌을 가지고 그가 보았던 것들로부터 그를 파내는 듯했고, 그래서 주변 사물들, 즉 옷장, 세면대, 여행 가방, 문을 그와 떼어 놓으려는 듯 여겨졌다.>(56쪽)

세상과 사람은 물론 무정물에서조차도 철저히 소외된 블로흐, 그가 저지른 ‘묻지마 살인’같은 극단적인 결과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유 없는 불안과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실패를 겪으며 살아간다. 종속변수로 전락한 현대인의 소외. 키커라는 독립변수의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는 골키퍼처럼 ‘0’에 가까운 성공확률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모순되게도 사회 시스템이 공고해지고 선택의 폭이 넓어질수록 불안감은 덩달아 커진다.

실직이나 배신, 왕따 같은 드러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성공하기 위해 이 직장에서 더 버텨야 할까, 아니면 과감하게 이직을 해야 할까?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를 보며 학원을 바꿔줘야 하나, 아예 전학을 시켜야 하나? 하다못해, 건강해지려면 한 종류의 비타민을 꾸준히 먹어야 할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지 등등...누구나 크고 작은 불안감에 젖어 있다.

나의 경우는 기자를 하면서 불안이 증폭됐다. 기자의 일은 부조리의 연속이었다. 그건 일의 소재인 삶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오늘의 특종이 내일의 낙종을 만회해주지 못하는 부조리.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이성을 뒤흔드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단 몇 문장으로 설명해야 하는 부조리. 온갖 근거들로 비판한 어떤 이가 실상 나중에 피해자로 드러나는 부조리...

그렇게 불안은 일상이 되다가 급기야 글이 무서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사를 쓸 때면, 단어가 주는 무게에 짓눌려 한 문장도 써내려가지 못할 때가 많았다. 지금까지 그 단어를 쓰고 읽을 때마다 가해졌을 수많은 해석들이 단어 위에 차곡차곡 올라타서 나를 무겁게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 이 단어를 이 뜻으로 쓰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손가락은 좀처럼 단어의 첫 자음 자판 위로 떨어지지 않았다.

작가 ‘페터 한트케’역시 글에 관한 비슷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관객모독>에서 보여준 난해한 언어실험에 비해서는 비교적 서사가 있는 편이지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역시 ‘말장난’같은 글쓰기가 계속된다. 세상에서 소외된 채 살인을 저지르고 점점 코너로 몰려가는 주인공의 불안이, 작가의 강박적인 글쓰기로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그 방법은 효과를 거둔다.

<블로흐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눈을 뜨고 있으면 주변이 부담스러웠고, 눈을 감고 있으면 주변의 물건들을 표현할 단어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22쪽)

<축하 전보도 단어들은 유창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행운을 빌며'라고 받아쓰면, 그 뒤에 무슨 뜻이 숨어 있는 것일까? '진심어린 인사를 보내며',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자랑스러운 조부모님'이란 누구를 위한 익명일까? 블로흐는 이미 아침에 신문에서 본 '왜 전화를 하지 않느냐?‘라는 작은 광고를 곧 특별한 함정으로 생각했다.>(87쪽)


******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120쪽)

책의 마지막 부분, 주인공이 동네축구 경기를 보며 어느 관중에게 한 이 말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읽었다. 과학적으로는 0에 가깝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실제 축구 경기에서 골키퍼가 페널티킥을 막을 확률은 2~30% 정도라고 한다. 의외로 열 번 중 두세 번은 골키퍼가 성공한다는 말이다.

내가 장악하지 못하는 삶의 변수가 나를 자주 무력감과 절망감에 빠뜨리지만 반대로 그 '변수' 때문에 늘 실패하지는 않는다는 것. 어쩌면 불안이 더 큰 쪽은 무력한 골키퍼가 아닌, 성공확률이 훨씬 높은 키커일지 모른다. 종속변수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수'에 희망을 걸어보는 것, 괴물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 숨 좀 돌리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책 속의 길] 129
이하늬 / 언론인. KBS대구방송총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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