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민간인 학살지에 선 백비...여든 노인의 증언 "내가 묻었다"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 입력 2018.08.3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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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댐·중석광산 터에 2기 세우고 위령제
목격자 "열흘간 수 백명 총살...어린 학생도" / 유족 "과거사법 제정"


원혼비(冤魂碑). 대구 민간인 학살지에도 70년 만에 백비(白碑)가 들어섰다.

이름도 무덤도 없이 희생된 수 많은 무명의 넋이 국가에 묻는다. 나는 누군인가. 왜 여기에 묻혔는가. 구순을 앞둔 노인은 70년 전 자신이 직접 구덩이를 파낸 뒤 땅 속에 묻은 이름도 모를 희생자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백비 앞에서 한맺힌 증언을 했다. 백비의 질문에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다.  

대구 민간인 학살터 두 곳에 세워진 백비(白碑)(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대구 민간인 학살터 두 곳에 세워진 백비(白碑)(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가창댐 맞은편에 백비를 설치하고 있는 유족들(2018.8.30.가창면 용계리)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가창댐 맞은편에 백비를 설치하고 있는 유족들(2018.8.30.가창면 용계리)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상임대표 윤호상)'가 꾸린 '백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 위령순례단'은 지난 30일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부 하에서 우리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됐던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지인 가창댐 맞은편(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138-1)과 대한중석광산 옛터(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산 99-3)에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하얀색 백비 2기를 세웠다. 정부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과거사기본법 재개정 촉구가 목적이다. 당초 대구형무소 옛터인 중구 삼덕동2가 삼덕교회 인근에도 세우려 했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2기만 세우게 됐다.

백비를 세우는 자리에는 유족들과 당시 사건 목격자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백비를 설치하기 전 각 장소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목격자 증언을 들었다. 순례단은 지난달부터 대구경북을 비롯해 전국 민간인 학살지에 백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10월 판문점 일정을 끝으로 해산한다.  

특히 이날 대구에서는 1953년 오뉴월 쯤 당시 22살로 중석광산 경비였던 서상일(87)씨가 종전을 앞두고 광산 근처에서 군복을 입은 이들이 민간인을 사살한 것을 직접 본 사실을 증언했다. 또 자신이 직접 그 시신을 묻었다고도 했다. 서씨는 골짜기를 가르키며 "계곡 가장자리 군복입은 이들이 사람들을 세우고 총을 쐈다"며 "그들이 떠나면 경비들이 땅을 파고 시신들을 묻었다"고 했다. 또 그는 계곡을 가로질러 학살지로 추정되는 광산 앞 화약창고 터로 올라간 뒤 "누런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녀 꼽은 아낙네,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면서 "죽을 죄를 지을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백비 앞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서상일씨(2018.8.30.가창면 상원리)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백비 앞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서상일씨(2018.8.30.가창면 상원리)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중석광산 화약창고 인근에서 학살터를 가르키는 목격자 서상일씨(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중석광산 화약창고 인근에서 학살터를 가르키는 목격자 서상일씨(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서씨 증언에 따르면 그해 5~6월 매일 밤 40~50명의 사람을 실은 트럭이 광산으로 올라갔다 빈 차로 내려왔다. 남대구경찰서에서 나온 경찰병과 함께 산 위 경비초소에서 일한 그는 골짜기 어딘가에서 포승줄에 묶여 끌려간 이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동이 틀 무렵 그는 동료들과 화약창고 인근 터와 폐광 아래 골짜기 두 곳에 구덩이를 파 시신을 묻었다. 열흘간 반복 된 수습이 끝나고 보름을 앓아 누웠다. 그는 "경찰이 총을 들고 따라다니며 '입을 떼면 모조리 죽이겠다'고 입단속을 시켰다"며 "총든 사람 말이 법인 세상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여기서 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유족들의 피맺힌 절규도 이어졌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에 연행됐던 故(고) 김희원(사망 당시 28세)씨의 딸 김선희(71)씨는 "70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정부가 왜곡되고 가려진 역사를 바로 잡아달라"고 호소했다. 이정주(70) 경주유족회 부회장은 "국가가 죄 없는 국민을 죽이고 사과는커녕 진실을 은폐했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진실규명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대구 '가창댐'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유족들(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대구 '가창댐'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유족들(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최대 1만여명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댐(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최대 1만여명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댐(2018.8.30)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한편,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50년 7월 대구형무소 재소자 1천여명이 경산 코발트광산, 대구 가창골, 칠곡군 신동재 등에서 집단 사살됐다"고 규명했다. 진화위는 형무소 수용인원(1800여명)의 2배가 넘은 4천여명이 수감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 10월항쟁, 제주 4.3항쟁, 국가보안법 위반 재소자, 국민보도연맹원 등 '좌익사범'으로 몰린 이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최대 1만여명의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골은 1959년 댐이 들어서면서 조사와 유해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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