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뉴스 리터러시'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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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칼럼] "시민을 호도하는 부정직한 언론행위...시민이 '가짜뉴스' 감시하고 응징해야"


 오늘도 가짜뉴스가 ‘카톡’으로 들어온다. 세계적으로 지천이다. 지역기자 출신인 빌 어데어 교수(미국 듀크대)는 아예 가짜뉴스 검정기관을 설립해 가짜뉴스 판별사가 됐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검증한 가짜뉴스는 1만3천 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는 지난 7월 18일 서울에서 열린 ‘2018 팩트 체크 콘퍼런스’에서 가짜뉴스에 대해 기조연설을 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 가짜뉴스를 확산시켜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하려 하기 때문”에 가짜뉴스가 세를 불려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내가 말한 대로 안 나온다.”라고 취재원은 흔히 말한다. 기자는 인터뷰 기사일 경우, 보도하기 전에 취재당사자에게 초고 메일을 보내 피드백을 받기도 한다. 보도 자체가 당사자의 잘못을 다룰 경우, 초고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더욱 당사자의 말(반론)을 반드시 듣고 기사에 반영한다. 그렇게 해도 당사자는 “내가 말한 대로 안 나왔다.”고 때로 말한다. 이해관계가 없는 단순 사건사고기사도 현장에서 목격한 시민은 기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말을 하곤 한다. ‘있는 그대로’를 이해관계 없이 취재하고 보도하는 일도 엄밀히 보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을 미디어에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기자는 기자의 관점에 따라 상징의 언어로 기사화하여 주관적 사실을 만들어 보도한다. ‘내가 말한 대로 안 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떨 때 우리는 기사를 보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의 수준과 기자가 마련하여 제시한 사실의 수준이 다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프레임(frame)이 개입한다. 기사는 기자가 프레이밍(framing:틀짓기)한 것이다. 프레임은 처음부터 설정되기도 하지만 취재 중 또는 취재 후 취재를 정리하면서 설정되고 프레임에 따라 기사가 작성된다. 프레임 밖의 정보는 아무리 많은 말이 있더라도 삭제되고, 취재원은 자신이 말한 대로 안 나온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기자가 프레임을 설정하여 프레이밍을 하더라도 아무런 하자는 없다. 기자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프레이밍은 많은 정보를 여과해서 명료화 단순화 계통화하여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가 아니더라도, 모두 그대로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한번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언론계의 보도(寶刀)인 ‘객관성’이라는 말도 그 비현실성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사실 객관성이란 없다. 실재하는 것은 ‘객관화’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같이 진술하는 여기에는 기자본연의 순수성이 내재되어야 한다. 불순한 목적성이 연계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프레이밍도 객관성도 미디어윤리 측면에서 부합되어야 한다.

 고의성 없는 가짜뉴스는 없다

 문제는 고의성(또는 불순한 의도성)이다. 고의적인 왜곡, 과장, 허위, 조작보도이다. 고의성이 없는데도 왜곡이나 허위보도가 나올 수 있다. 마감시간에 쫓겨 경찰조서를 급히 보고 빨리 쓰다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거나, 참고자료를 잘못 적용하여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럴 때 기자는 악의 없이 빚어진 부분을 시인하고 정정보도 한다.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심리 하더라도 고의성이 없는 허위왜곡은 중재가 쉬워진다. 허위로 꾸밀 의도가 없는 오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언론)가 고의적으로 조작 왜곡했을 때는 문제가 같지 않다. 그것은 가짜뉴스(거짓뉴스)의 준동이다. 가짜뉴스는 고의적으로 가짜(거짓)를 생산한 것으로, 본성이 가짜인 뉴스이다. 고의성이 없다면 단순오보에 지나지 않으며 가짜뉴스라고 하지 않는다. 고의성이 없는 가짜뉴스는 없다. 그런데 가짜뉴스는 그 고의성(불순한 의도성)을 감춘는다. 외형으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뉴스포맷을 구비하고 유통된다. 의도한 바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적국을 대상으로 전파되던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가깝다. 프로파간다는 그 형태 속 내용의 사실유무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의도적으로 설정한 목표의 달성이 생성 목적의 전부이다. 가짜뉴스도 그러하다. 사실과는 무관하다.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오늘날 대한민국 가짜뉴스를 얘기하면서 해방 후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첫째 전직·현직의 기자들도 거의 잘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 언론학계에서도 역사학계에서도 정직하게 다루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고, 셋째 언론사상 그 유례가 없는 가짜뉴스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요점은 이것이다. 1945년 12월 27일자 1면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미·영·소) 외상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 논의,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표제의 기사가 실렸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반면,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한다는 예측기사였다. 그런데 실제 미소의 주장은 정반대였다. 미국이 신탁통치를 시종(루즈벨트부터) 주장하였음에도 신탁통치는 소련이 제의한 것으로,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한 것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보도시점 또한 삼상회의 발표시점이나 미군의 입수시점보다 하루 이틀 앞선 것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내용이 발표된 시점은 동아일보 보도 다음 날인 12월 28일 오후 6시(서울시간)였고, 주한미군이 그 결정내용을 입수한 것은 12월 29일이었다. 예측기사의 출처(‘워싱턴 25일발 합동’) 또한 모호하고 의문스러운 것이었다. 이 같은 유형의 동아일보의 왜곡보도는 그 후에도 지속되었고, 반탁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신탁통치 지지자를 매국노로 매도하면서 반탁운동을 주도한 친일파를 애국자로 치환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반탁=반소=반공=애국, 친탁=친소=용공=매국의 공식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김동민(2010)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 연구, 한국언론정보학보 2010년 겨울 통권 52호).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왜곡보도는, 70여년이 지난 이제는 가짜뉴스 차원에서도 널리 알려져야 한다. 그 의도성에 대해서도, 그 출처에 대해서도, 최대의 수혜자와 표적에 대해서도, 미군정하 엄격한 검열이 실시되던 때에 어떻게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도, 그 변명에 대해서도, 그 교훈에 대해서도 지금이라도 기자는 알아야 한다. 정당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사실과 정반대로 왜곡된 가짜뉴스를 보도하여 역사흐름을 뒤바꾼 점에 대해 기자는 깊이 사고해야 한다. 언론의 사명이 ‘진실의 추구’라면 기자는 이 논제를 놓고 면벽해야 한다.

 요즘 커뮤니케이션의 시대는 거짓정보시대, 가짜뉴스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뉴스가 귀하던 시대도 있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뉴스가 도착하지 않아서 신문을 휴간한다는 팻말을 내걸고 외국에서 선박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뉴스가 귀한 시기에 뉴스는 탄환이론 피하주사이론의 사례처럼 강효과를 보였었다. 그만큼 위력이 굉장했었고 높은 대접을 받았었다. 뉴스의 영향력을 모방한, 시민을 현혹하는 ‘기사형 광고’도 등장했다.

 가짜뉴스의 기준: 고의성, 표적, 수혜자, 근거

 1980년 9월 28일자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게재된 ‘지미의 세계’라는 날조된 가짜뉴스, 1989년 4월 20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실린 ‘산호초 훼손 사건’(바닷속 산호초에 'K.Y.'라는 이니셜을 새겨 바다 환경을 훼손하였다는 이 고발성 사진은 사진기자의 자작으로 밝혀짐) 등 가짜뉴스가 이어졌다. 가짜뉴스는 가짜뉴스를 생산해서는 안 되는 언론에서 허점을 보였고, 그것은 점점 벤치마킹같이 번졌다. 그 후 현재는 가짜뉴스가 온 세상을 배회하는 전성시대가 됐다. 곳곳의 공장에서는 양산 체제로 돌입했다. 카톡에서는 진짜처럼 포장되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화급하게 배달된다. 유튜브, 페북, 포털을 휩쓴다.

 고의적으로 생산되는 가짜뉴스는, 사실성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이 뉴스는, 이 뉴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므로 존재한다. 환경적 조건이 되어 있는 셈이다. 반면에 가짜뉴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대개가 왜곡된 정보에 의한 피해자일 수 있다. 가짜뉴스는 속임수이다. 진짜처럼 보이게 한 속임수에 속아 가짜뉴스를 믿는다는 것은 속임수를 믿는 것과 같아진다. 그래서 속임수의 가짜뉴스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짜뉴스는 고의성, 표적, 수혜자, 근거 등 4가지를 기준으로 판별할 수 있다. 고의성; 뉴스는 어떤 의도에서 생산되었으며, 수혜자; 뉴스로 인한 수혜자는 누구이며, 표적; 뉴스는 누구를 겨냥하고 있으며, 근거; 뉴스는 어떤 자료(출처의 명확성, 자료의 정확성 및 신뢰성 등)를 제시하는지 눈여겨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가짜뉴스는 자료가 취약한데 신뢰할 만한 뚜렷한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출처가 아예 없거나 흐릿하거나 편협한 것이라면 전적으로 의심해야 한다. 위의 동아일보도 이를 적용하면 여실히 가짜뉴스의 특성이 드러난다. 내한테 솔깃한 뉴스이더라도 차분히 점검해봐야 한다. 어느 뉴스에나 호감을 가질 수 있겠으나 속임수에 현혹당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없어야 한다. 내 입맛에 딱 맞는다고 점검도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동조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없어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회지식인층에서 동조하는 이가 많다는 사실이다.

 정직한 언론을 바란다면

 가짜뉴스를 앞에 두고 진짜니 가짜니 하는 그 성분에 비중을 두는 자체가 뒷북이다. 생산자는 이미 목적을 달성한 다음이고, 가짜 판명은 생명도 없는 잔존물에 청진기를 갖다 대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짜뉴스의 생산을 차단하는 길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뉴스의 속성을 이해하는 능력, 뉴스 리터러시(News Literacy)를 키우는 일이다. 결국 시민의 ‘뉴스 리터러시’, 광의의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가 대책이다. 초중고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뉴스 리터리시 학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민이 가짜뉴스를 감시하고 응징하여야 한다. 미디어와 뉴스의 속성까지 알고 있는 시민에게 가짜뉴스는 혐기성 세균처럼 맥을 못 출 것이다.

 시중의 정통성의 언론조차 시민의 언론수준 이상으로 언론의 수준을 높이지 않아왔다. 더욱이 가짜뉴스는 부정직한 언론행위의 소산이며, 부정직한 언론행위는 시민을 호도하는 것이며, 이 사회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악물이다. 그러한 가짜뉴스를 바라지 않는다면, 정직한 언론을 바란다면, 시민이 나서야 한다. 이제 시민이 나서야 할 때가 많아진 시대이기도 하다. 내일도 가짜뉴스가 ‘카톡’으로 들어올 것이다. 

 
 






[유영철 칼럼 17]
유영철(兪英哲) /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언론정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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