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날 선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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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동 칼럼] 검찰의 최강욱 비서관 '업무방해죄' 기소를 보며


#1. 거의 30년 전에 다녔던 사법연수원 과정에 2개월의 변호사 실무가 있었다. 지도 변호사로 지정된 사무실에서 변호사 업무를 직접 익히는 과정이었는데 나의 지도 변호사로 배정된 분은 검사 출신의 노변호사분이셨다. 첫날 사무실에 가보니 사무실도 좁고 낡아 앉을 책상도 없었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변호사업의 애환에 대하여 듣고는 두 달 동안 그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분은 사법연수원에 제출하는 평가서에는 마치 열심히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힌 것처럼 적어주셨다.

#2. 범죄를 저지르고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들은 조금이라도 가벼운 형벌을 받기 위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탄원서나 사실확인서를 많이 받아 온다. 그 내용이야 피고인이 평소 착실한 사람으로 동네에서도 궂은일도 마다 않는 모범적인 사람이며, 특히 이번 일로 노모가 쓰러져 누워 딱하다는 둥의 천편일률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인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최강욱 비서관이 조국 전 장관의 아들이 자신의 법무법인에서 인턴을 하였다는 확인서를 써준 것을 검찰이 허위의 문서로 대학원의 입시업무를 방해하였다고 하여 업무방해죄로 기소한 뉴스를 보면서 언뜻 위의 두 경우가 떠올랐다. 나를 위하여 평가서를 작성한 지도 변호사나 피고인을 위하여 탄원서를 작성한 이웃들도 허위의 내용이 포함된 사적인 문서를 작성하여 공적인 기관에 제출한 것이다. 나는 이제는 작고한 그 변호사님에게 평가할 만한 자료 자체를 작성하여 제출한 적이 없었고, 피고인의 이웃들은 문서의 내용에 관하여 일일이 확인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올바른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인간적 정리에 의하여 자신이 아는 사실과 조금 다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주는 것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에서 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옳지 않은 일들에 나서게 되는 것은 인간관계에 의하여 마지못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문서들이 어떤 목적으로 쓰인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큰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1의 경우에 당시 변호사 연수는 형식적인 것으로서 대부분의 연수생들이 변호사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히기보다는 곧 있을 최종 시험에 몰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또한 지도 변호사들의 평가는 다 칭찬 일색이어서 사법연수원의 평가업무에 별 차이를 가져오지 않았다. 또한 #2의 경우에도 이웃들이 작성하여 법원에 제출하는 탄원서에 적힌 사실을 판사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며 양형에 있어서도 크게 참작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형법에 의하면 자신 명의의 문서에 허위나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이 공무로 작성하거나 의사가 작성하는 진단서가 아니라면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은 잘못된 일이기는 하나 법이 개입하여 나설 정도는 아니며 또한 현실적으로 수사기관에서 일일이 세상에서 작성되는 모든 사문서의 내용의 진실을 따져 기소하기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무소나 학교나 경찰, 검찰과 같은 수사기관과 법원 등 공적 기관뿐만 아니라 사기업에까지 제출되는 모든 사문서들의 진실성을 수사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언뜻 생각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분이 법이 규율하는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양심이나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혹은 단체 자체의 규칙과 징계 등의 규범들이 법 이전에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통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법은 ‘규범성의 임계지점’에 있다고 말하였다. 규범이 지켜지지 않으면 아니 되는 부분, 또 그것이 파괴되는 극단적인 경우에 법이 나타나는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자정작용에 의하여 해결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어 온 부분에 법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 최강욱 비서관이 조국 전 장관의 아들의 로스쿨 지원에 첨부한 인턴 확인서를 써주었다는 이유로 검찰이 업무방해죄로 기소한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지만 무엇보다도 형벌의 범위 밖에 있다고 여겨진 사회의 관행에 갑자기 칼을 들이댄 것이 놀랍다. 대법원 홈페이지에서 업무방해죄에 관한 판례를 대충 찾아보아도 이러한 경우를 찾기는 힘들었다. 개인이 자신의 서명이나 날인이 있는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어딘가에 쓰임이 있기 때문인데 이를 접수한 기관의 업무를 방해하였다고 처벌하는 것은 사문서의 내용에 일부 허위의 내용이 있더라도 처벌하지 않는 형법의 취지를 없애는 것이다.

 나는 최강욱의 확인서가 허위인지 여부는 전혀 알지 못하고 이는 앞으로 법원의 재판 과정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설령 허위라고 하더라도 이번 검찰의 기소는 그동안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등 다른 규범에 맡겨졌으며 앞으로도 법이 개입하기 불가능한 부분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외적으로 개입한 경우로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를 남길 것이다. 특히 피의자신문을 거치도록 하는 검찰의 실무지침을 어기고 전격적으로 기소한 것이나, 이런 무겁지 않은 사소한 공소사실에 대하여(조국의 아들은 그 대학원에 합격하지도 않았다고 하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대학원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한 바도 없다) 무슨 국가의 대역범죄이기라도 한 양 서울지검의 차장들이 검사장에게 몰려가 항의하고 검찰총장까지 개입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장면은 보는 사람들까지 민망하게 하는 부끄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대구 '검찰개혁' 촛불집회(2019.10.4.대구2.28기념공원 옆)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 '검찰개혁' 촛불집회(2019.10.4.대구2.28기념공원 옆)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많은 국민들은 조국과 그 가족에 대한 검찰의 과도한 수사와 기소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누구라도 운이 나쁘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정의는 검찰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특정인에 대한 검찰 권한의 행사가 법의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사건들과의 관계에서 형평성을 잃고 우리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결코 정의롭지 않은 것이다. 무심하게 건넨 농담이나 문자 메시지까지 훗날 수집되고 공개되어 유죄의 증거로 제시되고 치욕을 주는 사회는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제시한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세계이다.

 조국이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펴낸 <절제의 형법학>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다.

"형벌만능주의, 중형엄벌주의는 시민사회의 자율적 통제능력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요컨대 형법은 칼이다. 이 칼은 의사의 메스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사용되어야지 망나니의 칼처럼 휘둘러져서는 안 된다. 이 칼은 ‘사회적 유해성’이 명백 현존한 행위에 대하여 다른 제재수단이 없는 경우에만 가해져야 한다."          







[이재동 칼럼 5]
이재동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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