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계하는 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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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동 칼럼]


 독일의 소설가 권터 그라스의 대표작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는 부모를 비롯한 기성세대의 타락에 실망한 나머지 자신의 세 번째 생일에 스스로 지하실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일으켜 성장을 멈춘 어린아이로 양철북을 목에 매고 나치 치하의 독일을 살아가게 된다.

 오스카는 특이한 능력이 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도 않는 높은 목소리를 냄으로써 유리창을 마음대로 깨트리는 것이다. 오스카는 나치의 폭력이 횡행하는 밤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상점의 유리창을 적당한 크기로 깨트려 행인의 도심(盜心)을 자극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그 도시에서 엄격하기로 유명해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숄티스 판사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상점의 유리창을 깨트리는데, 이 판사는 세 번은 도둑이 되기를 거부하였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손을 내밀어 ‘오소리 털로 된 면도용 솔’을 훔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후로 숄티스 판사는 ‘온후하고 관대하며, 항상 인간적인 판결을 내리는 법관’으로 칭송받았다는 것이다.

 범죄의 유혹에 굴복한 판사가 오히려 세인의 칭송을 받는 훌륭한 판사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이 역설은 오늘날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완벽하게 옳은 인간은 없다. 불완전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판단한다는 어찌 보면 모순이기도 한 일은 사회의 유지를 위하여 불가피한 것이지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재판은 항상 잘못된 결론에 이를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나라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피고인에게 세 번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이도 부족하여 일정한 경우에는 재심을 받을 권리를 부여하는 이유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그 판결이 진실에 부합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재판에 내재한 한계는 법관이 자신의 판결에 관하여 한없이 회의하고 겸손하여야 할 까닭이다.

 쌍방의 다툼이 치열한 사건에서 판사가 결국 어떤 증거를 받아들이고 다른 증거를 배척하느냐의 문제나 끊어진 인과의 연결고리를 메우는 문제에는 판사 개인이 살아오면서 습득한 지식이나 경험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또한 확정된 사실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에서도 개인의 가치관이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모든 판결은 그 판사의 개인적인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이 개인의 편견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하여 법률 이외의 부문에 대한 공부와 세상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필요로 한다. 시인 월트 휘트먼이 판사를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라 한 것은 이런 뜻일 것이다.

 우리가 사도법관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고 김홍섭 판사는 사형선고를 내리는 도중에 목이 메어 한참이나 묵념을 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어느 편이 죄인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불행히 이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그 점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경심 교수에 대한 말 많은 이번 판결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우리 형사소송규칙에 판사가 판결을 선고할 때 피고인에게 훈계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훈계(訓戒)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한 것을 타이름’이다. 피고인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는 것이고 유죄 판결을 내릴 경우에 잘못을 질책하고 타이르는 것은 일응 당연한 것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훈계’라는 말에는 도덕적 우열관계가 내재되어 있고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를 전제로 하기도 한다. 스승이나 부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들을 훈계할 수는 없다. 동료들끼리도 훈계를 하지는 않는다. 우리 판사들의 선발과정을 보면 판사는 법률적 지식을 갖춘 사람일 뿐이지 피고인보다 인격이 더 훌륭하거나 인생 경험이 많아 세상물정을 더 많이 알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기도 한 소설가 도스토옙스키가 감옥에서 영혼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났고 정말 사악한 자들은 감옥에 오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하였다.

<한겨레> 2020년 12월 24일자 4면(정치)
<한겨레> 2020년 12월 24일자 4면(정치)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범죄를 부인하는 피고인에게 만약 증거조사를 거쳐 유죄로 판단될 때에는 엄하게 가중처벌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런 말은 일응 당연해 보이지만 막상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은 엄청난 위협을 느끼며, 억울함을 밝혀보겠다는 의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반성하지 않고 범행을 부인하는 것이 형량을 정하는 데 부정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수긍이 가는 일이지만, 이러한 말은 판사가 내린 결론이 무오류의 진실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판사의 자신감이 세상을 아직 덜 산 데서 오는 미숙함의 소치일 때 세상에 큰 해를 끼치는 것을 자주 본다.  

 정경심 교수에 대한 과중하고 광범위한 수사나 기나긴 재판의 과정은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양 쪽의 공방이 치열했고 판사는 고민 끝에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선고는 좀 더 겸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섣부른 자신감으로 호통치고 훈계하는 판사가 아니라 자신의 결론에 대하여 회의하고 겸허한 판사를 원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 어찌 다 완벽할 수 있으랴!     







[이재동 칼럼 13]
이재동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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