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고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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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 칼럼] 시대를 혼돈하게 하는 '일터의 형편'


인생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유머라고 생각한다. “환하게 웃는 자만이 현실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다. 맞서 이기는 게 아니라 유머러스하게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니체가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에 공감하는 것은 웃음에는 의미들을 희화하는 힘이 있어 웃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허무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유머는 환하게 웃으며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넘어서고 싶은 마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노동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겪으면 치받아 오르는 화를 견디지 못해 마음이 더 거칠어지고 과격해지는 것이다.

노동 상담 전화를 받았다. 근무한 지 1년이 넘어 연차휴가를 사용하려고 노동청에 알아봤더니 혼자 근무하는 사업장이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던데 그게 맞는 건지 물어왔다. 5인 이하 사업장에는 연차 휴가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법이 사람을 차별하는 게 있을 수 있느냐?”고 “작은 데서 일하는 게 무슨 죄냐?”고 항의를 하는데 답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대구 한 아파트의 경비노동자(2020.6.16)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 한 아파트의 경비노동자(2020.6.16)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경비원 노동자 상담을 했다. 한 아파트에서 3년 가까이 일했는데 2개월짜리 근로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을 해주지 않아 해고되었다고 했다. 지난해 9월 ‘아파트 경비노동자 보호법’이라고 불리는 공동주택관리법이 일부 개정되고, 이 법에 근거해 대구시에서도 공동주택관리규약 준칙이 개정되었다. 법과 준칙에 아파트 경비원 등 근로자에 대한 괴롭힘 금지 및 괴롭힘 발생 시 보호조치의 내용이 담겨 있어 경비노동자들의 노동권이 보호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2, 3개월 초단기 근로계약이 번져나가면서 경비노동자들은 말 그대로 파리 목숨이 되었다. 경비업무는 상시지속업무이지만 대다수가 55세 이상의 고령 노동자라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법>에 의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 근로계약에 대한 갱신 기대권이 인정되어 노동위원회에서 구제받는다고 해도 유효한 근로기간은 2개월이다. ‘경비노동자 보호법’도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법’도 있지만, 그의 고용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다.

3월에 다시 쿠팡에서 2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6일 서울 구로 캠프에서 일하던 관리자 직급의 노동자와 심야 배송을 전담하던 서울 송파캠프 소속 계약직 노동자가 숨을 거둔 것이다. 지난해 칠곡 물류센터 장덕준 씨를 비롯한 쿠팡 노동자 사망 사고가 이어지면서 노동환경과 야간 노동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쿠팡은 고인이 된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야간 노동의 위험성과 노동 강도에 대해서는 지워버렸다.

대구의 어느 택배기사(2020.8.13)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의 어느 택배기사(2020.8.13)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3월 16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또 노동자가 사망했다. 사망 노동자는 포스코케미칼 협력업체 직원으로 기계 수리 중 기계 사이에 목이 협착되어 사망했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2018년 7월 취임한 이래 17번째 사망사고다. 최정우 회장은 2월 22일에 개최된 국회 산재 청문회에 산재 다발 기업의 대표로 출석해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며 사과했다. 또 노조와 시민사회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중립 의결권을 행사해 3월 12일 주주총회에서 포스코 회장 연임에 성공하고 그 자리에서도 “안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회장 연임 바로 4일 후 노동자가 기계 수리 작업을 하던 중 움직이는 설비에 머리가 끼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위험한 작업 시의 2인 1조 원칙도 지키지 않았고 수리 중 기계를 멈추지도 않았다고 한다. 노동부가 특별근로감독을 하던 중이었다고 하니 산재 사망을 대폭 줄이겠다는 정부의 말이 꾸며낸 거짓말처럼 들린다.

노동 상담을 하면서 접하게 되는 일터의 형편은 시대를 혼돈하게 한다. 일하다가 사고로, 병으로 죽는 사람이 매일 있다. 영세사업장, 대기업 가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법질서와 공정과 정의가 화두인 듯 한 2021년과 매치되지 않는다.

웬만하면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와 느긋하고 유머러스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번 생은 어려울 것 같다. 산적한 문제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 항쟁으로 들어선 정부에서, 개헌 말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석수를 가진 여당 국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기본권을 지키려는 정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머는 고사하고 자꾸 초조함과 분노가 쌓이는 것은 그래서이다.







[정은정 칼럼 16]
정은정 / 대구노동세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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