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같은 삶, 어두운 밤길 헤쳐가셨던 강창덕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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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현 / '인혁당' 피해자 야성(野星) 강창덕(姜昌德) 선생님을 추모하며


기어이 가셨습니다. 평생을 염원하던 자주적 평화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6월의 어느날 함께 한 식사가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아직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아직 함께 가야 할 곳이 남아 잇는데, 아직 배워야 할 가르침이 남아 있는데 끝내 가셨습니다.

"통일학교를 만들어 말년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통일교육을 하며 후진양성을 하다 통일을 맞고 싶었다"며 옛 사건들과 아흔의 소회를 말씀하시던 강창덕 선생님(2017.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통일학교를 만들어 말년 여생을 보내려고 마음 먹었다. 그렇게 통일교육을 하며 후진양성을 하다 통일을 맞고 싶었다"며 옛 사건들과 아흔의 소회를 말씀하시던 강창덕 선생님(2017.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7번 투옥에도 낙천적이셨던 선생님

참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1944년 17세의 나이에 반일사상 고취의 혐의로 첫 구속을 당한 이후 선생님의 삶은 그야말로 분단과 독재의 현대사와 함께 한 삶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해방이후 1947년 12월 26일 대구공회당(현 대구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 일반남녀 학생 웅변대회'에서 당시 대구 상업중학교 야간부 학생연사로 나서 "미국이 조선문제를 실질적으로 미국의 영향하에 놓여있는 UN에 상정하여 남조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책은 남북분단을 획책하는 음모"라고 규탄하고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주장했습니다. 또한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방해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성토하셨습니다.

서슬이 푸른 군정시절 미국의 분단국가 수립시도를 꿰뚫어 보시고 이에 당당히 맞섰습니다.  이 사건은 세칭 '대구공회당 웅변대회 소요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선생님은 3번째 구속이 되셨습니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최초 기사'로 소개된 강창덕 선생님(<경산신문> 2007년 10월 8일자)...강창덕 선생님은 1956년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2년 뒤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겼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최초 기사'로 소개된 강창덕 선생님(<경산신문> 2007년 10월 8일자)...강창덕 선생님은 1956년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2년 뒤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겼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까지 7번 투옥되면서도 굴하지 않고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나서셨습니다. 특히 1974년에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구속과 고문까지 당했습니다. 수많은 동지들을 잃었고 선생님도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 8개월간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7번의 투옥 속에서도 결코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선생님을 만나면 늘 웃음으로 사람을 맞이해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현대사는 희망보다 좌절이 많았던 시기입니다. 4·19혁명이 있었지만 5·16쿠데타로 민주정부가 무너졌습니다. 유신독재가 끝나고 80년 서울의 봄이 오나 했지만 전두환 군사독재가 들어섰고, 87년 6월 항쟁이 있었지만 12.12반란의 주범 중 한 명인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늘 변혁을 믿었고 밝은 표정으로 난관을 이겨나가셨습니다.  

1998년 '민족화합 국민운동연합 발기인 대회'의 강창덕 선생님(왼쪽에서 두 번째) / 사진 제공. 김두현(강창덕 선생님께서 자택에 보관하시던 사진)
1998년 '민족화합 국민운동연합 발기인 대회'의 강창덕 선생님(왼쪽에서 두 번째) / 사진 제공. 김두현(강창덕 선생님께서 자택에 보관하시던 사진)

수 십년 과거의 일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시던 선생님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선생님의 80세 생신 때 제작한 자료집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까지 선생님의 삶을 기록해 놓은 글을 보며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10년전 아니 수 십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해 내셨습니다.  1971년 "민주수호 경북협의회"활동을 기억하신 글입니다.

1971년  '민주수호 경북협의회' 활동
1971년 초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에서 '민주수호협의회'가 결성되었고 대표는 함석헌 선생,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천관우 동아일보 주필 등으로 구성됨. 대구에서는 1971년 4월에 '민주수호 경북협의회'를 조직하고 대표 류한종 혁신계 대표, 최해청 전 청구대학 학장, 박삼세 전 경북대 교수, 주병환 전 국회의원, 김순택 민주변호사, 운영위원 이백희, 김증도, 김호일, 강창덕, 이재문 등 약 20명, 총무위원장 강창덕, 대변인 이재문, 청년위원장 정만진 등으로 구성됨. 사무실은 대구백화점 717호실로 하였음.


언제 결성하였고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무려 47년 전의 일을 생생히 기억해내셨습니다. 심지어 사무실 호실조차도 기억해내셨습니다. 이보다 더 앞선 시기의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2019년 1월 열린 '野星 강창덕 선생(93세) 토크콘서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90이 넘은 연세에도 수 십년 전의 일을 어제일인 듯 또렷이 기억을 되살려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의 이런 엄청난 기억력 때문에 현대사의 속살을 살펴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2010년, '4.9인혁열사 35주기 추모제 및 여정남공원 제막식'(2010.4.10 경북대 사회과학대 앞)...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8년8개월을 복역한 강창덕(83) 고문의 추도사 / 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2010년, '4.9인혁열사 35주기 추모제 및 여정남공원 제막식'(2010.4.10 경북대 사회과학대 앞)...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8년8개월을 복역한 강창덕(83) 고문의 추도사 / 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2021년 '인혁당 46주기 추모제'.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던 강창덕 선생님은 "희생자들의 뜻을 이어가자"고 호소했다.(2021.4.9.경북 칠곡 현대공원) / 사진. 평화뉴스
2021년 '인혁당 46주기 추모제'.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던 강창덕 선생님은 "희생자들의 뜻을 이어가자"고 호소했다.(2021.4.9.경북 칠곡 현대공원) / 사진. 평화뉴스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 변화를 중히 여기시던 선생님

선생님의 이상은 분명하였습니다. 민중이 주인되는 민주주의 세상과 남북이 하나되는 자주적 평화통일 세상이었습니다. 80여년의 삶은 변하지 않고 그 이상을 추구하며 뚜벅뚜벅 한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현실에서 정치의 역할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이상은 분명하되 현실적 변화도 중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운동적 삶은 다른 운동가의 삶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젊은 시절 일찍이 정당활동을 하셨던 것이지요.

2007년 '평화통일 숲가꾸기 행사'. 개성공단에 있는 봉동관 식당에서 건배사를 하시는 강창덕 선생님 / 사진 제공.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2007년 '평화통일 숲가꾸기 행사'. 개성공단에 있는 봉동관 식당에서 건배사를 하시는 강창덕 선생님 / 사진 제공.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선생님은 1956년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 경산군 선거사무장으로 당시 전국에서 제일 높은 70%이상의 득표율을 이끌어내셨습니다.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산군에 제 5대 민의원 후보로 직접 출마도 하셨습니다. 1961년 5월에는 '남북 학생회담 촉진 시민궐기대회' 사회당 경북도당 주최로 개최하여 궐기사를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1991년에는 평민당(김대중 총재)과 신민주연합당(준)이 통합하여 출범한 신민주연합당 전당대회의 임시의장을 맡기도 하였고, 이후 민주당 계열의 정당에서 정당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더불어민주당 대구시당의 상임고문으로 늘 정당행사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정당에 몸을 담으면서도 이상을 이야기하셨고 본질적 문제 제기를 언제 어디서나 하시면서도 현실 정치의 역할을 인정하셨습니다.

1991년 '신민당 통합 출범 전당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강창덕 선생님 / 사진 제공.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1991년 '신민당 통합 출범 전당대회'에서 연설하시는 강창덕 선생님 / 사진 제공.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넉넉히 품어 주셨던 선생님  

막걸리를 즐겨 마시셨던 선생님은 언제나 후배들과 기꺼이 술 한잔 하시기를 즐기셨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나이가 많건 적건 동지라고 따뜻하게 불러주셨던 선생님. 선생님은 후배들이 어느 자리에 있건 어떤 운동을 하건 가리지 않고 품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불의에는 추상 같고 역사 앞에서는 당당하셨지만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혁명가이셨습니다. 어두운 길 밝히며 역사의 길을 헤치셨던 고단한 삶, 이제 내려놓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후배들이 선생님이 꿈꾸셨던 민중이 주인되는 민주세상, 남북이 하나되는 평화통일의 세상을 만들어가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선생님과 다시 만나 한바탕 대동춤을 추겠습니다.

김두현. 개성공단에서 강창덕 선생님과 함께
김두현. 개성공단에서 강창덕 선생님과 함께









[기고] 김두현
수성구의원. 전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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