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임진왜란, 그 이후 한중일 3국의 변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돈하 /
임진왜란, 동북아 3국을 둘러싼 국제대전...병자호란, 명청교체, 에도막부의 다른 길


2022년 7월 27일 개봉한 영화 <한산:용의 출현>을 통해 한국 사회는 또다시 충무공 이순신이 떠오르고 있다. 일치일란(一治一亂)...한번의 치세가 끝난 후 한번의 난세가 온다고 한다. 그 난세가 올 때면 우리는 역사인물 중 ‘이순신’을 떠올린다. 충무이공이 경험한 임진왜란은 조선 개국 200년만에 일어난 초유의 난세였다. 문충공 류성룡이 저서 <징비록> 서문에서 밝혔듯이 임진왜란이라는 재앙은 참담하고도 참담하였다. 한양, 개성, 평양 세 도읍지가 한달 사이에 왜군 16만 대군에게 강탈당했으며 조선 팔도가 와해되었다. 임금과 조정은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무 이공의 등장은 실로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그러나 충무이공의 등장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결코 우연은 아니다. 그는 이미 임진란 이전부터 치밀하게 전란을 준비했으며, 1592년 4월 12일에도 거북선에서 화포를 쏘는 훈련을 하였다. 4월 12일은 임진왜란 발발일 하루 전날이다. 전술했듯 세 도읍지가 무너지고 팔도가 왜적들에 의해서 짓밟히는 와중에서 충무이공은 조선의 바다를 굳건히 지켰다.

성웅(聖雄) 이순신

한양을 떠나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렀다가 다시 의주로 몽진한 선조임금에게 왜군 선봉장 소서행장은 편지를 보내 "이제 장차 어디로 가시고자 하무니까?"라는 조롱을 하였다. 그러나 이 조롱이 실로 무색해지게 된 것은 충무이공이 조선의 바다에서 왜군의 수륙양면작전을 차단하고 아군의 작은 손실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충무이공이 단순히 영웅을 넘어서서 성웅(聖雄)으로 기억되는 것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나라를 구해내었기 때문이다. 충무이공의 업적은 당대와 조선에서만 통용되지 않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사회에 깊이 각인되고 존경받았다.

1599년 새해가 되자 선조임금은 아직 조선에 주둔중인 명 장수들의 진영을 찾아 새해인사를 다녔다. 선조실록에선 세배(歲拜)라 하였다. 선조가 1599년 1월 9일에 만난 명나라 제독 마귀(상곡마씨 시조)는 충무이공이 전사하기 전부터 양장(良將)이라 높이 평가했던 사람이다. 마귀는 그 자리에서 선조에게 충무공의 충렬을 국가차원에서 기릴 것을 건의하였다. 선조는 이미 처리한 문제라고 답변한다. 이어 명나라 장수 등자룡의 전사를 애도하는 뜻을 비추자 마귀는 처리할 일이 많다며 그 자리를 물러가겠다고 했다.

선조실록 1599년 1월 9일조 기사는 충무 이공에 대한 선조 개인의 생각을 여러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사료이다. 조선을 직접적으로 구한 조선제일의 장수 이순신과 명나라 장수 등자룡의 전사를 놓고도 명나라 장수의 장례를 먼저 걱정한 조선국왕 선조이기에 이것을 단순히 외교적인 문제로만 해석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순신의 업적과 그 영향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각인된 한편 동아시아가 서양과 본격적으로 이어진 후에도 서양에까지 널리 파급되어갔다. 트라파가 해전에서 승리한 영국 해군제독 넬슨에 비유되지만 실은 충무이공의 공적은 이를 훨씬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그의 전사를 다루면서 "재능이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 백가지 재능 중 한가지도 베풀지 못하고 죽었으니 애석하다."라며 평가하였으니 과연 충무이공은 불멸하다 하겠다.
 
영화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2022) 포스터
영화 <명량>(2014). <한산: 용의 출현>(2022) 포스터

7년의 전란 임진왜란 이후 이순신은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한중일 3국의 역사는 불멸의 이순신과는 무관하게 각자의 변화를 맞이했다. 그 변화는 가히 변국(變局)이라 할만하였다. 임진왜란의 성격이 단순히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선, 명나라, 일본 등(이하 한중일 3국으로 지칭) 동북아 삼국을 둘러싼 국제대전임은 주지할 사실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이후 한중일 3국은 어떤 변국을 겪었는가?

조선, 광해군과 인조반정

우선 조선은 전술했다시피 개국 200년만에 임진왜란이라는 참담한 병화를 맞이해 개전초기 한달이 채 못되어 한양, 개성, 평양 세 도읍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왜란 발발직후, 선조임금의 중앙조정은 세자 광해군을 내세워 분조를 출범시켰으며, 각지에서 의병지원, 민심수습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와중에 이순신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조선의 제해권을 회복하고 일본군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공격진로와 보급로는 물론 수륙양면작전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했다. 또 전국에서는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덕령,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이 의병과 승병으로 분연히 일어나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의병의 창의는 일본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다.

이러한 노력과 움직임에 조선은 특유의 전투감각을 회복하였다. 임진년 이후 계사년을 지나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조선은 비록 이순신의 전사가 있었지만 일본에 대한 반격도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반격의 관심은 북쪽 야인노토부락으로 옮겨져 노토부락을 크게 정벌하였다. 조선군의 노토부락 정벌은 당장은 성공이었으나 그 결과에 대한 미래는 밝지를 못했다. 바로 누르하치가 이끌던 건주여진이 여진족의 힘을 하나로 결집되어 중원본토를 두고 명나라와 국운을 건 일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때의 상황은 마치 1115년 금나라가 성립되던 과정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금나라의 성립에 고려가 영향을 끼쳤듯이 청나라의 성립에도 조선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점이 서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명청교체기 앞에 놓인 조선은 국가생존의 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당대의 조선국왕 광해임금은 국가생존 전략을 실리를 취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줄다리기 외교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 집권여당 대북세력에 반대하는 숭명사대주의자들은 재조지은을 부르짖으며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을 옹립하였다. 능양군 즉 인조의 즉위로 조선의 대외정책과 생존전략은 변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정책과 상반된 인조정권의 정책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다는 재조지은에 초점이 설정되어졌다. 명나라를 어버이로 여기며 그 은혜에 의리를 다하겠다는 인조정권의 대외정책은 여진족의 청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하였다. 적이 된 청나라는 1636년 12월 10만대군으로 조선을 짓밟는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서애 류성룡이 그의 저서 징비록에서 염려하였던 징비의 정신은 고작 반세기도 되지 않아 잊혀진 것이다. 인조반정이란 명분없는 ‘정변변국’으로 인한 정책변경이 그 참화의 원인이다.

명청교체

둘째 중국 명나라의 변국은 ‘왕조교체’에 있었다. 명나라 쇠퇴와 멸망의 원인이 된 것은 명나라 13대 황제 신종 만력제 주익균의 치세기로부터 기인된다. 10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 만력제는 대학사 장거정의 엄격한 가르침 아래 황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그의 실체가 부패한 것으로 드러나자 실망하여 끝없는 태업을 계속하였다. 황제로서의 업무를 내팽개쳐 버린 것이다. 만력제의 근 30년에 가까운 태업은 명나라 멸망의 단초가 되는 셈이다. 재위의 대부분을 태업으로 일관한 만력제의 업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공을 받은 조선을 적극적으로 도운 점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암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력제는 ‘고려천자’라는 비아냥섞인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일 하지 않는 황제 만력제가 유독 열성을 보였던 조선에 원병을 보낸 일은 만력제 본인의 사치와 낭비가 더해져 명나라의 국가재정을 흔들리게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고대 십상시보다 더한 환관들이 만력제 이후로도 등장하여 국정농단을 일삼고 횡포를 부렸다.

깊숙한 내부로부터 부패한 명나라는 결국 사회혼란을 수습할 수 없었다. 외부에서는 신흥강호 청나라가 명나라의 숨통을 노리고 있었다. 내부의 균열과 외부의 도전은 농민군 지도자 이자성이 반란으로 북경 자금성이 함락되는 순간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주유검은 자금성의 뒷동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하였고 청나라 군이 북경으로 들어와 이자성 군을 몰아내었다. 청나라의 명나라 접수는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한족이 통치하던 명나라가 무너지고 여진족의 청나라가 왕조 자체를 교체한 것이다. 명청교체라는 왕조교체는 임진왜란 이후 중국 최대 변국이었다.

덕천가강, 에도막부시대

끝으로 세 번째 일본의 변국은 ‘정권교체’에 있었다. 1598년 9월 일본의 집권자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63세의 나이로 죽었다. 죽음에 임한 수길은 조선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자 일본군의 철병을 저지하던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54세의 나이로 순국하게 되었다. 이로써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전란이 끝난 후 일본에서는 명목상 수길의 어린아들 풍신수뢰가 수길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길이 생전부터 경계했던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드디어 야심을 드러내어 양 세력은 일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덕천가강은 원래 수길의 조선침략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중립적 입장을 택하였다. 덕천가강이 정권교체에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있었다. 임진왜란 종전 2년후인 1600년 9월 15일 단 하루만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역사의 명운을 갈라놓았다. 정작 풍신수길의 가문은 잠자코 관망하는 가운데 덕천가강을 지지하는 동군과 풍신수길을 따르던 서군이 모두 20여만명 규모의 병력으로 일전을 겨루어 동군이 승리하였다. 수길을 따르던 임진왜란 선봉장 소서행장 그리고 석전삼성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고, 협판안치, 도진의홍, 가등청정 등은 모두 덕천가강에게 내응하였다. 동군의 승리는 곧 정권교체를 이르는 것이다.

승리의 주인공 덕천가강은 안토도산시대를 종결짓고 강호(에도)로 수도를 옮겨 에도막부시대를 열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덕천가강은 조선에 강화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였다.(懇要和好) 그 과정에서 대마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러한 노력은 1609년 기유약조로 이어진다. 조선과 국교를 다시 회복한 일본 에도막부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왕래하길 원하였다. 그로 인해 조선의 선진문화를 접하고 배울 기회가 생겼으니 문화적으로도 안정을 누릴수 있었다. 에도막부시대는 실질적으로 전국(센코쿠)시대를 끝내고 통일된 정권과 체제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또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긴 하였으나 서양의 네덜란드와 부분적으로 교류하였다. 에도막부 시대는 일본 근대화로 가는 길목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중일 삼국이 바라보는 임진왜란

요컨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의 영향이 삼국에게 미친 영향은 제각각 모두 달랐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중국과 조선에 서성거리던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워 ‘왕조교체’라는 변국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풍신수길 사후 덕천가강이 기존정권을 끝장내고 에도막부 시대를 개창하여 ‘정권교체’라는 변국을 열었다. 임진왜란의 피해국이자 승리국인 조선은 임진왜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인조반정이라는 ‘정변변국’을 만나 병자호란이라는 참화를 다시 겪어야 했다.

1623년 조선에서 일어났던 정변은 이후의 조선을 바꾸어 놓았다.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300년 내내 특정한 정당이 세세로 권력을 잡아 일당전제화를 확립하였다. 이는 세도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그동안의 과정에서 국가와 백성들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결국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경술국치의 비극을 맞게 되었으며, 1945년 겨우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한.중.일 역사에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왕조교체, 정권교체, 정변.
각각 다른 유형을 가진 한중일 삼국이 바라보는 임진왜란의 시각 역시 서로 달랐다. 임진왜란의 직접적인 피해국인 조선은 문자 그대로 임진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일으킨 난리라고 표현하였다. 반면 가해자인 일본은 자국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쵸노 에끼(役)라고 부른다. 이것은 1990년 일왕 아키히토 씨가 일본강제침략기 시절 일본이 한국에게 가한 고통을 ‘통석의 염’으로 얼버무린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자신의 행위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출병이니 역이라는 단어로 그 책임에서 벗어나는 매우 교묘한 것이다. 이와 달리 중국은 임진왜란을 항왜원조(抗倭援朝)로 표현한다. 이는 조선을 공격한 일본을 막아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란의 전선이 평양이북인 요동으로 확대되지 않길 바라는 소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명나라는 자국의 영토인 요동으로 왜군이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조일전쟁

근래에 이르러 혹자는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으로 바꿔 부르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실제로 조일전쟁 이름이 담긴 서적이 출간된 적도 있었다. 그 혹자들이 왜라는 이름을 꺼리는 이유는 왜라는 단어에 화이관에 근거한 오랑캐라는 뜻이 의도되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조선의 이름이 청구, 고려 등 여러 이름이나 옛 이름으로 불려졌음을 상기한다면 그에 대한 설득력은 약한 편에 속한다. 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옛 이름이자 다른 이름이다. 왜를 일본으로 바꾸고 란(亂)을 전쟁으로 바꾸는 것은 일본을 높여 주는 것이자 그 침략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다. 亂의 뜻에는 병화, 전란의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이 가진 성격은 임진왜란이라는 명칭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렇게 바꾸고 싶다면 임진일침(壬辰日侵)이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즉 임진년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뜻이다. 아울러 임진왜란을 현대인의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바로 당대를 살았던 선인들의 입장 역시 반영해야 그 역사가 지워지거나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 역시 역사왜곡의 범주에 속하는 바이다.

 
 
 






[역사 에세이]
류돈하 / 직장인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