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 민중의 입장에서 돌이켜봐야”

평화뉴스
  • 입력 2006.10.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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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항쟁 60주년> 추모제
..."폭동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항쟁이었다”

'폭동이 아니라 항쟁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이일재(82) 선생.
"폭동이 아니라 항쟁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이일재(82) 선생.



"1946년 10월 항쟁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중항쟁이다.
‘폭동’은 미군정과 친일파의 시각일 뿐, 우리 노동자.농민의 분명한 ‘항쟁’이었다“

‘10월 항쟁’이 일어난 1946년.
당시 22살의 나이로 항쟁에 참가했던 이일재(82) 선생의 말이다.
이일재 선생은 그 때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경북도협의회] 간사를 맡고 있었다.

“전평은 대구경북 8천여명을 비롯해 전국 60만명의 조합원이 있었고,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강원도.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퍼져나가 12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특히, 경북 영천을 비롯해 경북 모든 시.군에서 연인원 15-20만명이 집회와 시위에 참가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1946년 9월 23일, 전평이 총파업을 선언하자 대구에서 총파업 현수막을 내걸었는데, 그것을 경찰이 철거하면서 충돌이 벌어졌고 며칠 새 노동자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번져갔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친일파에 대한 반발이 컸는데, 그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강제적인 공출(곡물수집정책)까지 자행해 노동자.농민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다”며 항쟁의 원인을 설명했다.

이 선생은 “당시에 적어도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지금은 당시 상황을 확인할 길이 없다”면서 “폭동이란 말은 미군정과 친일파의 시각일 뿐, 이제는 우리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10월 항쟁을 다시 돌이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폭동의 성격을 띄지 않는 항쟁이 어디 있겠느냐”며 “10월 항쟁은 폭동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항쟁이었다”고 강조했다.

가 시민사회 단체 회원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상감영공원에서 열렸다.
가 시민사회 단체 회원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경상감영공원에서 열렸다.




[10월 항쟁 60주년 항쟁의 거리순례와 추모제]가 10월 1일 낮 대구 경상감영공원에서 열렸다.
‘항쟁의 거리 순례’는, 이일재 선생의 증언과 설명에 따라 당시 항쟁의 주무대였던 경상감영공원을 출발해, 대구시민회관(당시 전평도지부)과 ‘쌀배급소’가 있던 태평네거리, 당시 ‘경북경찰청’이 있던 중부경찰서를 돌아오며 1시간가량 진행됐다.

이어, 추모제에서는 10월 항쟁의 진실을 밝히고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내용의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낮 12시에는 ‘한미FTA 저지 민중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대구경북민중연대’와 ‘통일연대’를 비롯한 38개 단체가 [10월 항쟁 60주년 행사위원회]를 꾸려 공동주관했으며, 단체 회원과 장기수, 평화통일운동 원로를 비롯해 20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 단체는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10월 항쟁은 민중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다"면서 "점령군인미군정과 친일파들의 시각이 아닌 우리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10월 항쟁을 다시 돌이켜봐야 한다"고 밝혔다.

또, "제주 4.3항쟁과 광주 5.28항쟁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10월 항쟁은 진실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면서 "10월 항쟁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미군정과 친일파에 반대한 민족적 양심과 항쟁의 정신을 이어가자"고 호소했다.


글.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10월 항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굿 '쌀, 물, 그리고 나무'...극단 '함께사는 세상' 박연희(40) 대표.
10월 항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굿 '쌀, 물, 그리고 나무'...극단 '함께사는 세상' 박연희(40) 대표.







<10월 항쟁 60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드리는 글>

국민여러분!

오늘 우리는 10월 항쟁 60주년을 맞이합니다. 기나긴 세월동안 10월 항쟁은 미군정과 친일친미반민족세력에 의해‘폭동’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10월 항쟁은 ‘진실’과 ‘민중’과 ‘역사’의 이름으로 새로이 기록되어야 합니다. 항쟁에 참가한 수많은 민중들이 돌아가셨지만 생존해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이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10월 항쟁’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항쟁과정에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진심으로 추모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민여러분!

10월 항쟁은 미군정과 친일친미 반민족세력에 대한 분노가 근본원인이었습니다. 1945년 8.15를 거치며 일본 패망후 들어온 미국은 우리에게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군으로 진주하였습니다. 미국은 들어오자마자 민중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를 강제해산시켰고 일제식민지 시절의 통치기구를 자신들의 통치기구로 대체하여 친일반민족세력을 그대로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미국은 우리 민중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땅과 공장도 자신이 가져갔습니다. 해방자로 믿었던 미군정은 주체가 바뀐 점령자였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친일반민족세력은 그대로 미군정에 기생하여 더욱 악랄한 반민족 반민중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10월 항쟁은 민중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8.15 이후 일본은 공장을 폐쇄하고 기계를 못쓰게 만들었고 미군정은 민족자립경제를 지원하기는 커녕 점령지에 대한 경제종속을 목적으로 우리 경제를 더욱 피폐화시켰습니다. 이에 더 이상 당할 수 없다는 분노로 노동자들은 총파업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또 미군정은 경찰들을 앞세워 강제적인 공출(곡물수집정책)을 자행했습니다. 이는 안 그래도 빈곤한 농민, 노동자 대중들을 더욱 곤궁으로 몰아넣었고 분노로 촉발한 대중들은 투쟁으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대구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던 항쟁은 10월 초를 넘어 전국적으로 퍼져갔고 약 230여만 명이 참가하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에 미군정은 미 전술군, 파업파괴단, 조선국방경비대, 각 지방의 우익청년단체들을 동원하여 관계자들을 체포, 테러하고 재산을 파괴했습니다. 미군정과 미국에 기생한 잔존친일파는 이를 ‘폭동’이라 규정한 것입니다.

국민여러분!

우리는 이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친일파에 대한 원한의 폭발, 미군정의 반동화 및 식량정책에 대한 반발, 생활고에 대한 분노, 인민위원회에 의한 행정과 치안 담당의 요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정당한 요구였습니다. 점령군인 미군정과 오로지 자신들만의 이익을 좇았던 잔존친일파들의 시각이 아닌 우리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0월 항쟁’이라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내일의 후손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오늘 우리의 책임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10월 항쟁’의 정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60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점령군으로 진주한 주한미군은 여전히 남아있고 미국은 한미 FTA강요, 전략적 유연성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생존’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군정의 지배정책을 반대하고 친일파를 반대한 민족적 양심과 반외세민족자주의 정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국민여러분!

제주 4.3 항쟁도 80년 5월 민중항쟁도 제자리로 찾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다 밝혀지지 못한 10월 항쟁의 진실을 제자리로 돌리고‘항쟁’의 과정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을 함께 추모합시다. 역사는 소수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생산의 현장에 있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국민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2006년 10월 1일

10월항쟁 60주년 행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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