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에 대하여

평화뉴스
  • 입력 2008.05.0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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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칼럼>


필자가 신문사 수습기자 교육을 받을 때 들은 말이다. “기자는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직업이다. 거지에서부터 대통령까지 모두 만나 취재할 수 있다.” 수습교육을 맡은 부국장의 이같은 언급은 기자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물을 만나는 직업이므로 편협한 사고나 고정관념 없이 열린 마음으로 취재에 임해야하고, 어느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게 취재할 수 있도록 능력을 갖춰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기자생활 20여 년 동안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운 좋게도(?) 두 번이나 대통령도 만났다. 한 번은 경북도청에서, 한 번은 청와대에서였다. 전자는 악수 한 번 하는 정도였고, 후자도 배정받은 질문을 하는 정도였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이하 박 대표라고 부른다)를 만난 것은 박 대표가 1998년 4월 달성 보선에서 당선된 이후 얼마 안 된 시점이다. 신문사 앞 음식점에서 국장 부국장 부장단 10여명과 점심식사 시간을 가졌다. 정치에 갓 입문한 박 대표는 수줍은 듯 하면서도 차분하였다. 대화는 주로 정치에 관한 것으로 사회부장인 필자는 별로 말하지 않고 들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성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반주가 곁들인 자리였지만 식사위주였고 덕담이 오가며 약간의 흥이 돌았지만 식사가 끝나자 일어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때 필자는 착하고 조용한 분이 그런 정치판에 왜 휩쓸리게 됐는지, 잘 되었다는 생각보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났다. 박 대표가 정치인으로 이렇게 부각될 줄도 몰랐다.

이번 총선에서 많은 후보들은 망가졌다. 재기불능 상황까지 추락한 후보도 많다. 당선은 되었지만 구차한 후보도 많다. 이회창 후보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군소정당 후보도 아닌, 대통령이 될 뻔한 제1야당 대통령후보의 이 같은 처신은 차라리 측은에 가깝다. 과거 지지자였다면 분노에 가까울 것이다. 친박연대, 친박성향의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후보들도 일면 구차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중 지난 17대 때 지역구민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한 후보도 있을 것이다. 군복까지 입고 나와 이벤트를 꼭 했어야 했는지 의아심이 드는 후보도 있다. 후보들의 얄팍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박 대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후보들까지 당선시키는 위력을 보였다. 박 대표의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 한 마디가 그들을 살려냈다. 입후보자가 자신의 구호와 사진보다 박 대표의 사진과 코멘트를 더 비중 있게 플래카드에 내거는 선거는 처음인 것 같다. 이 같은 박 대표의 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박 대표 만큼 고통을 겪은 사람도 드물다. 아니 거의 없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이란 박 대표의 수필집(1993년간) 제목처럼 만약 그러했더라면 겪지 않았을 불행을 당한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세상에서 살면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던 박 대표는 1974년도의 일기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 참된 가치와 기쁨을 목표로 마음의 평온을 찾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세상은 악인들의 것, 악인들이 세도를 부리며 살기에 딱 맞는 풍토를 지니고 있다’고 이 세상을 진단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바른 마음, 바른 언행으로’ ‘죽는 날까지’ 살아갈 각오를 다진다. 그런 그에게 또다시 고통이 안겨진다. 대통령인 아버지도 여읜다. 그후 1991년 나이 40이 되면서 일기에 ‘인간 세상은 헛되고 또 헛되다’, ‘인간 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이나 꿈이 없다’고 적는다. ‘인간이 살다가는 기간은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 점 하나 잘 찍으면 선인이 되고, 잘못 찍으면 악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소중한 삶을 잘 살아야 한다’고 되새긴다.

박 대표의 고통은 그의 모든 꿈과 희망을 앗아갔지만 그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눈과 바른 마음을 주었다. ‘고통의 신비’였다. 그의 일기 중에 하늘은 선인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악인을 벌하지도 않는다는 내용도 적혀 있다. ‘하늘은 하늘대로 자연법칙이 있고, 사람의 운명은 사람 손에 있다’는 순자(荀子) 천론편(天論篇)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박 대표는 직접 경험의 산물로 모든 것을 버리는 지혜를 얻었다. 꿈도 희망도 모두 버렸다. 모든 것을 버린 다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박 대표가 필요했던 쪽에서 적극성을 보인 영입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 달성군의 보선에서 당선된 박 대표는 이제 4선의원이 되었다. 지난 대선 경선과정에서는 뭇비난을 막아냈다. ‘독재자의 딸’이라는 비난도 ‘부모의 허물이 있더라도 자식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인륜의 도리로 감수해냈다. 박 대표는 정치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 관련 학과 출신도 아니고, 석.박사도 아니다. 이공계 학문을 하고자 프랑스 유학을 떠났으나, 육여사의 서거로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바도 없는 학사출신인 박 대표가 정치판에 우뚝 서게 된 것도 아이러니이다. “나중에 말씀드리겠다”와 같이 말을 아끼는 절제의 미덕도 지녔다.

그러나 박 대표를 5년 뒤에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벼르는 사람들 속에서 바른 마음을 유지해 나갈지. 꿈과 희망을 버렸기에 찾아든 평화가- 현재 4선의원이 된 것과는 무관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욕심을 부린다면. 또는 욕심의 울타리에 가리워져 있다면.

박 대표를 지지하는 쪽은 그가 깨끗한 이미지로 계속 남아있길 바란다. 약속을 지키는 듬직한 정치인이 드물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대쪽’이미지가 ‘갈대’이미지로 바뀌는 것을 보아왔던 것이다. 박 대표가 정치판에서 단수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 대통령이 되든 안 되든 관계없이, 정치 초단의 초심을 잃지 않길 바라고 싶다. 국민으로부터 찬사를 받는 대통령이 되면 좋겠지만, 대통령 하면서 욕먹고, 대통령 마치고 욕먹는 것보다는 아예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박 대표는 30여년전 일기에서 ‘가치관의 변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 말한 것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는 게 말의 무서움이기도 하다. 더 이상 고통이 없기를!

<유영철 칼럼 9>

유영철(언론인. 전 영남일보 편집국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편집장 ycyoo17@naver.com)



(이 글은, 2008년 4월 14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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