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역주권을 민간 업체에 넘길텐가"

평화뉴스
  • 입력 2008.06.2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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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 추가협상] 김진국(대경인의협 공동대표)
"추가협상은 착시현상..차라리 '협상 파기'를 선언하라"

장마가 시작되었다. 잠시 비가 그친 하늘은 언제라도 비를 다시 퍼부을 듯이 바람을 몰고다니면서 잔뜩 찌푸리고 있다. 이 장마 그치더라도 기후변화에 따른 집중호우가 7, 8월 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니 당분간은 이명박 대통령이 “캄캄한 산 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기나긴 촛불의 행렬을 구경하기 어려워 질 지도 모르겠다.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기 위해 천기(天氣)를 살피던 봉건시대의 군주처럼 이명박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장마가 시작될 무렵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들끓는 민심 앞에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면서 비서진들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며칠 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무역대표부와 가졌던 추가협상결과를 발표했다.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이라는 자화자찬과 함께...

이번 미국산 쇠고기 추가협상결과를 놓고 다소 진전된 내용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긴 한데, 이는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이야기를 보통사람들로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말만 골라 쓰는 김종훈 본부장만이 가진 특유의 어법에 따른 착시현상일 뿐이다.

특별기자회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원하지 않은 한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할 것”이라면서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대책으로 미국을 다녀온 김 본부장이 풀어놓은 보따리는 미국 농무부가 보증하는 “품질시스템 평가 프로그램”을 통해 30개월 이상의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들도( 2008. 6.22 『 미 농무부의 미친 짓, 그걸 믿겠다는 한국 정부』)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미국 농무부가 찍어주는 도장 하나에 온 국민의 건강을 떠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프로그램의 운영 시한 또한 막연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을 국민이 신뢰할 때까지”라고 했는데, 국민의 신뢰수준을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것인지, 어느 수준에 이르렀을 때 프로그램 운영을 폐지할 것인지 양국 협상대표 간에 어떤 밀약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종훈 본부장이 협상테이블에 “촛불시위가 가장 대규모였던 지난 10일 시위현장을 찍은 큰 사진을 올려놨다”고 자랑삼아 이야기 했으니, 아마도 양국 협상대표는 한국의 촛불시위의 규모를 통해 국민의 신뢰수준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 이명박 정부는 촛불을 잠재울 큰 비를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산쇠고기를 둘러 싼 논란은 30개월 이상의 월령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 조기 비준을 구걸하기 위해, 또 캠프 데이비드 숙박료를 지불하기 위해 광우병 위험 물질의 수입제한을 모두 풀어버린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광우병 위험물질은 월령의 구분이 없다. 더욱이 동물성 사료 정책을 고집하고 소의 혈장성분으로 만든 대체분유로 송아지를 키우고 있는 미국 축산업계의 사육방식이 계속되는 한 미국에서 갓 태어난 송아지라 하더라도 그 송아지에서 추출한 위험물질은 식용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국민들의 막연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검증된' 세계보건기구(WHO)의 인간 광우병 예방에 대한 절대적 권고 기준이다.

그런데 협상의 성과로 몇 가지 위험물질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가 내려졌다며 생색을 내고 있지만, “수입업체가 주문을 하지 않는 선”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단서가 붙어있다. 사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팔아먹을 재주를 가진 장사치가 어디 있을까마는, 또 굳이 사들여오겠다는 기업체에 대해 기업규제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이명박 정부가 무슨 근거로 제재를 할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협상 본문에는 단 한 글자의 수정도 하지 못한 추가협상이 어떤 구속력을 가질지도 의아한데 정부는 규제의 모든 책임을 미국과 한국의 쇠고기 관련 업체에 돌려버렸다. 권력을 스스로 놓아버린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검역주권을 아예 통째로 기업인들에게 넘겨주고 만 셈이다.

지난 4월에 있었던 한미 쇠고기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한미 FTA 조기비준을 얻어내기 위해 미국정부에 베풀어 준 향응에 불과한 수준이었음을 이명박 대통령이 특별기자회견에서 스스로 고백하다시피 했다. 향응과 뇌물로 기업을 키워온 70년대 CEO의 경영방식이 한미 외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부당하게 맺어진 협상의 ‘재협상’ 수준이 아니라면, 차라리 ‘협상 파기’를 선언하고 원점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성난 민심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책일 것이다. 지금 국민들은 “값싸고 질 좋은 미국산쇠고기”를 못 먹어서 아우성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진국 칼럼 15]
(김진국 평화뉴스 칼럼니스트.대구경북 인의협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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