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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지난 선풍기를 보며 아버지를 그리다

기사승인 2008.11.14  18: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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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미강
"젊지도 늙지도 않은 지금, 어릴 적 스치던 아버지 손길을 느낍니다"

유난스럽게 무덥던 올 여름, 가장 유용했던 물건은 에어컨과 선풍기였던 듯싶다. 한 여름이야 에어컨이 있으니 선풍기가 오히려 거치적거렸지만, 여전히 더웠던 9월과 10월은 에어컨을 틀 수 없으니 선풍기가 짜증을 덜어내 준 고마운 물건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은 5층에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는 남향이어서 에어컨이 켜주지 않는 날은 그야말로 찜통이다)

이상기온으로 인해 아무리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자연의 법칙인 계절의 변화를 막을 수 없는 일. 10월 중순부터 서서히 가을더위가 꺾이더니 오색단풍이 눈부시다는 가을의 막바지가 되고 쌀쌀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게 될 즈음에야 선풍기는 다시 자리를 차지하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네 개의 프로펠러가 만들어내는 바람이 더위로 인한 짜증을 몰아내던 선풍기의 올해 일은 정말 끝난 셈이다.

창고에 들여놓으려고 커버를 씌워 잠시 한 쪽에 놔둔 선풍기를 보니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그 녀석이 부러워졌다. 부채보다는 훨씬 문명적이지만 에어컨보다는 뒤쳐지고, 부채보다는 첨단이지만 에어컨보다는 아날로그적인 선풍기가 처음 나왔을 당시만 해도 그저 전기만 꽂으면 어디서 그런 바람이 나오는지 그 시원함에 세상의 때가 말끔히 씻겨 내리는 것 같다며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구식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을 하니 문득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인 마흔 중반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 전파사를 하셨던 아버지...아버지는 자부심이 대단하셔서 평소에도 양복을 입고 일을 하셨다고 한다.

전파사를 하셨던 나의 아버지는 선풍기를 잘 고치셨다. 마을사람들이 고장 난 선풍기를 들고 오면 우선 그물망을 풀고 프로펠러가 금이 갔는지 나사가 헐거워졌는지 확인하셨다. 좀체 벗겨지지 않을 거 같은 프로펠러를 떼어내면 비로소 드러나는 바람의 극점, 바람을 만들어내는 핵심인 모터. 아버지는 그 옆에 붙은 갖가지 부속품들을 드라이버로 이리저리 치시면서 수리에 몰두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왜 그리 아버지가 우러러 보였는지. 고장 난 부위를 잘도 찾아내셨고 아무리해도 돌아가지 않던 선풍기에 아버지의 손길이 한번 스치면 휘휘휙 날개가 돌아가는데 어릴 적 난 그게 마술 같았다.

 
 
▲ 미음사...'아름다운 소리를 파는 집'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선풍기 몸체 구석구석을 닦으셨다. 그리곤 내게도 때에 절은 그물망을 깨끗하게 닦아오라고 곧잘 시키셨다.

얼마의 용돈까지 생기는 그물망 닦기 작업은 당시 내겐 전혀 수고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재미있었던 기억만이 있을 뿐.

 

‘아름다운 소리를 파는 집’라는 뜻의 ‘미음사(美音舍)’라는 이쁜 간판을 달고 장사했던 그때 우리 가게 뒷마당에서 나는 여름철마다 선풍기망을 닦았던 추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닦다보면 어디선가 바람이 스~ 하고 불었는데 그건 내 몸을 잘 닦아줘서 고맙다는 선풍기의 마음이 하늘에 전해지는 것 같았던 그 기억을.

중년의 나를 닮은 철지난 선풍기를 보니 아!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

 
 

 

 

 

[주말에세이] 권미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화뉴스 pnnews@pn.or.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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