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쌀로 지은 햅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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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편지] 김윤곤..."몸 성찮아 보이던, 흰머리에 초췌한 어르신의 얼굴.."


청도를 지난다. 온통 감이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풍년이다. 잎은 지고 감만 남은 나무는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감으로 빼곡히 뒤덮인 나무가 무척 무거워 보인다. 마치 간신히 견디는 고열처럼, 순식간에 닥친 돌림병처럼 감들이 번진 것이다. 이 메마르고 팍팍한 세상에 풍년이라니…….

이젠 그 어감조차 턱없고 어울리지 않는다. 골병 들 대로 든 농촌 사정을 생각하면 반가우면서도 딱하다. 중국산에 밀리고, 소비 위축에 눌려, 흉년이면 흉년이어서 딱하고 풍년이면 풍년이어서 딱한 것이 우리의 농촌 현실이다.

배값이 폭락해 나주 어디에서는 한 해 동안 농사지은 배를 깔아뭉개 땅에 묻었다. 일일이 봉지까지 씌우며 애쓴 노동과 정성은 헛것이 되었다. 춘천 어디에서는 한 통 500원에도 팔리지 않는 배추를 농협 본부 앞에 산성처럼 쌓았다. 300평(대략 3,000포기 정도 수확한다)당 50만5천 원을 주고 사들여 산지 폐기한다는데, 한 통에 170원 꼴이다. 전남 지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벼 야적 시위가 벌어졌다. 한 가마에 5만5천 원 선인 쌀 수매가를 올리고, 쌀 직불금 수령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였다. 한미 FTA로 가장 먼저 무너지는 데가 쌀 농가다. 거기다 쌀 직불금 문제는 농민들의 타들어가는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이 나라 정부는 사실상 농촌을 포기한 듯하다. 농업구조와 농촌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지만 정부는 말로만 떠들 뿐, 짐짓 모른 체한다. 농촌 문제의 근본에는 유통의 문제가 있다. 농산물 값이 급등락을 반복하는 데에는 저장, 보관의 문제를 포함한 유통의 문제가 핵심이다. 이러한 농산물의 수매, 저장과 유통의 큰 몫을 담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농협이었다. 전국적인 연계조직을 갖춘 농협이야말로 이에 적격이다. 그러나 농민의 출자로 시작된 농협은 주인이자 상전인 농민을 호구쯤으로 여기거나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한 국감자료에 따르면, 농협은 수입한 포도.키위.레몬.바나나.오렌지.파인애플.고사리.도라지.연근 등의 취급 금지 품목을 버젓이 팔아 왔고, 심지어 수입 양주, 수입 와인, 수입 맥주까지 팔아 왔다. 이것도 모자라 수입 수산물, 축산물을 팔기까지 했다. 농업 개방 시대에 농민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는커녕 등골 빼먹을 짓만 골라 하고 있다.

이런 판에 농협장의 연봉과 판공비가 1억 원을 넘긴 지는 오래고, 2005년부터 올 8월까지 4년간 농협 임직원의 횡령.유용 따위로 인한 금융사고 규모는 253건에 334억여 원에 달했다. 앙상하게 찌든 농민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비만덩어리 농협, 내부 통제 시스템조차 망가진 채 양심에 털 무성한 거대 조직 농협의 일대 혁파 없이 농촌의 내일은 암담하다.

이러니 별 수 있겠는가 싶었을까. 나라로부터 내팽개쳐진 농민들 중엔 이러기도 한단다. 자기네가 먹을 작물에는 농약이며 생장 촉진제, 착색제 따위를 안 치거나 거의 안 치고, 내다팔 작물에는 듬뿍 친다는 얘기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요즘엔 대부분이 중국산인 수입 콩을 사다가 휴일을 골라 도로가 공터에서 자기네가 지은 콩과 섞어 타작을 한단다. 참깨도 그렇고 쌀도 그렇게 섞어 판다는 것이다. 농촌을 팽개친 나라꼴도 기가 막히지만, 이렇게 안으로 무너져가는 농촌은 더욱 가슴 아프다. 정말 그랬다.

바로 어제 청도를 지나다 창고 앞에서 콩 타작하는 어르신을 따라가, 마침 떨어진 쌀과 함께 콩이며 참깨를 샀는데, 오늘 햅쌀로 지은 밥이 이상했다. 밥솥에 평소와 같이 물을 부었다는데 된밥이었다. 이제야 손바닥에다 쌀을 한 줌 올려놓고 살펴보니 윤기 없는 묵은 쌀이었다. 가슴 안이 먹먹해지며 엘리베이터 하나가 내려앉았다. 몸이 성찮아 보이던, 흰머리에 초췌한 어르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국산은 아닐 거야, 아니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이러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지금 이 땅 농촌의 현실이 퍽퍽하게 씹히는, 묵은 쌀로 지은 햅쌀밥.


 

 

[시인의 편지 4] 김윤곤 시인

경북 경산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계간 '사람의 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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