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의 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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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신영철 대법관, 정의의 숨통을 조여 버렸다"

인간이 먹고 싸고,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사회라면 법은 어디서든 존재해 왔다. 법에 대한 관념은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인간의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법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법률업이 인간의 세 가지(나머지 의업과 성직) 지적 직업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서양 신화를 근거로 법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린 채 한 손엔 칼을, 다른 손엔 저울을 들고 있다. 칼은 법의 정의를 실행하는 법의 ‘강제력’을, 저울은 갈등하는 이해관계의 ‘평등과 균형의 원칙’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눈가리개다. 눈가리개는 ‘법은 공평하다’는 것과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라’는 공평무사를 상징한다.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는 법의 중요성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이 각기 특정 의미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합법과 불법의 대립은 곧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을 의미한다. 합법적인 것은 무엇이든 질서 있는 것이고 불법적인 것은 무질서한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합법적이며 질서 있는 것은 ‘옳은 것’이고 불법적이고 무질서한 것은 ‘그른 것’이라는 관념이 들어차 있다. 이것을 좀 더 확장시켜 보면, 옳은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이성’ 또는 이성의 지배를 대변하는 것이고, 그른 것은 ‘폭력’ 내지 힘의 지배를 대변한다는 믿음 또는 확신을 갖게 된다.

최근 신영철 대법관의 서울중앙지법원장 재직시 ‘촛불재판 몰아주기 배당’ 개입의혹이 우리 사회에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보수적 성향의 판사에게 촛불사건의 재판을 몰아주기로 배당하려다 다른 단독 판사들의 반발로 철회한데 이어, 작년 10월 9일 집시법상의 야간집회 금지규정에 대한 위헌심판제청에 대해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이미 수차례 촛불사건의 담당판사들에게 보내 재판을 빨리 마무리하라고 요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소한 일로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어처구니없는 ‘무지의 변’이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부담되는 사건들은 후임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처리”하려던 개인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공성진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말처럼 “지휘자로서의 나름대로의 지휘철학을 전하려는 의무”때문이었을까. 필자의 이해력 부족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여러 가지 의혹들뿐이다.

정부의 입맛에 맞는 판결압력을 내린 것은 아닌지. 법관들 간의 관계가 수직적이며 법관조직이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조직의 상명하복관계라는 특수성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 모든 판사들의 승진 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는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위임받거나 사실상 나누어 가진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의 권한을 개별 법관들의 사건 재판에 남용한 것은 아닌지. 법원의 상층부가 행정부나 군대와 같은 특정 관료조직처럼 인사권을 통해 하급법관들을 줄세우려고 한 것은 아닌지.

어쨌든 이 사건은 신 대법관의 행위 자체가 매우 정치적이며 동시에 사법부의 독립권과 자율성을 크게 훼손시킨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이번 촛불재판 개입의혹에서 그동안 우리의 법원조직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에 몰려 있었는지도 확인됐다. 법이 ‘인간 공동체를 다스리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규칙이나 원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 법을 집행하는 법집행자가 그 법을 어기는 국가를 어찌 법치국가라 부를 수 있겠는가.

대법원 앞에는 이른바 ‘정의의 여신상’이라는 조형물이 서있다. 한 손에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든 채 눈을 감고 있다. 저울은 양형기준의 형평성을, 법전은 법치의 엄격성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여신은 왜 눈을 감고 있을까? 아마도 정의로운 법적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는 잡다한 유혹을 차단하고 공평무사를 나타내는 결연한 자세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조형물에서는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칼이다. 서양 신화를 근거로 하더라도 마땅히 법전 대신 칼이 들려 있어야 하는데 왜 법전일까.

한국 사회의 법 집행에서 법의 강제력을 상징하는 칼의 상징은 온데간데없다. 거기다 저울이라는 것 역시 현실 재판에서 판결의 균형과 형평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셀 수도 없는 거액의 회사 돈으로 비자금을 형성하고 차명계좌를 개설하는 등의 온갖 불법을 저지른 재벌이, 이 기묘한 저울 위에서는 사회에 공헌한 경제인으로 정상참작의 대우를 받는다. 저울의 고장인지, 법전이 잘못 인쇄된 것인지, 아니면 눈 감은 여신이 그때만 졸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상식의 눈금으로 측량할 수 있는 사회적 범죄 앞에서 비문투성이의 기묘한 고어로 구성된 판결문의 만연체는 자주 황사바람을 날리고 있다. 법의 정의는 무력한 여신과 함께 꾸벅 꾸벅 졸고 있고, 여신이 어딘가에 내팽개친 녹슨 칼은 가난한 고물상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신 대법관의 행위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그의 행위는 한마디로 불법적이었고 무질서한 그른 행위였으며, 그 결과 힘의 지배를 대변하는 국민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다. 그 점에서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법과 법적용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법의 최고 가치인 정의(dikaiosyne)의 숨통을 조여 버렸기 때문이다. 정의는 ‘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한 자로서 대우받아야 한다’는 형식적 평등 이념과 ‘각자에게 돌아갈 몫을 각자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라’는 균등분배의 이념이 결합할 때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 법치의 문란이 발생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정의가 온전히 숨쉬게 하는 일이리라.





[이재성 칼럼 6]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과정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기획조정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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