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향촌동, 그 특별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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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문화해설사 김종석씨, "꽃자리.녹향..향촌동 귀공자 구상 시인...폐허 속에 바흐의 음악이.."

대구 중구 향촌동 골목길...1950년대 한국전쟁이 나면서 대구로 몰려든 작가들은 이 곳에서 전선문학의 꽃을 피웠다. 시인 구상과 조지훈,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이 골목을 누볐다(2009.6.2 대구시 중구 향촌동 / 사진. 남승렬 기자)
대구 중구 향촌동 골목길...1950년대 한국전쟁이 나면서 대구로 몰려든 작가들은 이 곳에서 전선문학의 꽃을 피웠다. 시인 구상과 조지훈,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많은 예술인들이 골목을 누볐다(2009.6.2 대구시 중구 향촌동 / 사진. 남승렬 기자)

1950년대 향촌동과 북성로를 찾은 피난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여관과 다방, 음악감상실...대구 중구청은 골목길탐방투어를 하면서 과거 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자리에 현판을 붙였다(사진.남승렬 기자)
1950년대 향촌동과 북성로를 찾은 피난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여관과 다방, 음악감상실...대구 중구청은 골목길탐방투어를 하면서 과거 문인들이 즐겨 찾았던 자리에 현판을 붙였다(사진.남승렬 기자)

1950년대 대구시 중구 향촌동은 특별했다.

6.25 전쟁을 피해 대구에 몰려든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이 동네 골목 골목을 누비며 '전선문학'의 꽃을 피웠다. 구상, 조지훈, 유치환, 박두진, 박목월, 오상순, 양주동, 이육사, 이영도, 이효상, 서정희, 최정희를 비롯한 시인들과 화가 이중섭, 아동문학가 마해송, 소설가 정비석, 작곡가 권태호, 김동진...

향촌동, 전쟁과 절망 속에서도 낭만과 음악이 흐르다

1950년대 향촌동은 그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거리이자 한국문단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예술인들이 향촌동과 이 일대 북성로 곳곳을 누비며 낭만과 풍류를 즐겼다.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낭만이 있었고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비록 가난했지만 예술가들의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그 시절, 향촌동과 북성로를 누비며 숱한 일화를 남긴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2일 오전 경상감영공원에서 골목문화해설사 김종석(66)씨를 만났다. 김씨와 함께 향촌동과 북성로를 2시간가량 걸으며 한국전쟁을 전후해 이 곳에서 머문 작가들의 에피소드를 들었다.

"경상감영공원의 선화당은 지금의 도청이라 생각하면 되고, 징청각은 관찰사가 기거했던 관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대구읍성은 1736년 영조 임금 시절 축조된 2.7km 길이의 성입니다. 성의 관문을 따 동성로, 북성로, 서성로 등의 지명이 생겨났습니다. 성이 없어진 것은 1906년 가을과 1907년 봄 사이입니다. 당시 관찰사였던 박중량이 일본 상인들의 상권 활성화를 위해 성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요"

김종석(66)씨
김종석(66)씨
김씨는 경상감영공원의 선화당과 징청각, 대구읍성의 유래를 들려준 뒤 향촌동 골목길로 발길을 옮겼다.

골목에 들어선 그는 "현재의 향촌동과 북성로는 허름한 건물의 식당과 여관, 성인텍들이 늘어서 있어 실버타운화 됐지만 1920년대부터 상권이 동성로와 중앙로로 옮겨가기 전인 1970년대까지 이 곳은 서울 명동에 버금가는 번화가였다"고 설명했다.

또, "과거 영광의 흔적은 거의 다 사라졌으나 골목 골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를 풍미했던 예술가들의 자취는 곳곳에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김씨가 골목 귀퉁이 한 세탁소를 가르켰다. "1950년대 초 시인 유치환이 살았던 집"이라며 "이 일대 곳곳이 피난살이 온 조지훈 시인과 구상 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던 곳"이라고 말했다.

'향촌동의 귀공자, 시인 구상..."온나, 한 잔 사줄께"

그 시절 구상 시인은 어땠느냐고 묻자 김씨는 "낭만을 아는 '향촌동의 귀공자'라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김씨가 '대화숯불갈비'와 '등심해장국감자탕'이라는 간판이 걸린 골목 앞에 멈추더니 구상 시인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한다.

"저기 대화숯불갈비 보이십니까. 1950년대 저 건물 1층은 '대지바'라는 고급술집이었습니다. 구상 시인이 가끔 들러 한 잔하던 곳입니다. 구상 시인은 술을 마시고 싶어도 돈이 없어 먹지 못하는 신출내기 젊은 문인들에게 '온나, 한 잔 사줄께'하며 요즘 말로 '한 턱' 내기도 했습니다. 또 저기 등심해장국 건물 2층은 여공 출신의 미모의 '장 마담'이란 여성이 운영하던 '호수다방'입니다. 많은 문인들이 저 곳에서 4.19와 5.16을 보내며 시대를 이야기했습니다"

'판코리아 성인텍'이란 간판이 걸린 곳에 이르렀다. 김씨는 "원래 이 자리(판코리아 성인텍)에는 일제시대 초기 '명석'(明夕)이라는 유명한 요정이 있었는데 해방을 전후해 '화월여관'으로 바뀌었다"며 "지금으로 치면 별 5개짜리 최고급 시설을 자랑하는 호텔로 구상 시인과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이 자주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폐허 속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

화월여관 뒤 골목 끝에는 '르네상스 음악감상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르네상스는 1951년 1.4후퇴 때 호남갑부의 아들 박용찬이 개업한 음악감상실로 많은 예술가들이 찾았다. 특히, 당시 한국전쟁을 취재한 외신들이 전쟁 상황을 빗대 '폐허 속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고 전했던 곳으로 김동진, 유치환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자주 이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판자집 유리딱지에 아이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골목 '국제미공사' 앞에서 김씨가 시를 읊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였다. 시인은 1956년 이 시를 발표하고 국제미공사 건물 2층에 있었던 '꽃자리다방'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시집의 표지는 이중섭이 그렸다. 당시 출판기념회를 찾은 공초 오상순은 자신이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인냥 말끔히 차려입고 나타나 시선을 끌었다고 한다.

꽃자리다방 맞은 편 지금의 '한일유료주차장' 자리에는 '청포도다방'이 있었다. 김씨는 "다방의 이름은 이육사가 그의 시 제목 '청포도'를 따 지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근에 있는 '백록다방' 자리로 발길을 옮긴 김씨는 화가 이중섭의 이야기를 꺼냈다.

은박지에 그려진 이중섭의 '소'

그는 "백록은 경북여고 출신의 '정'과 '안'이라는 두 명의 여성이 문을 연 다방으로 많은 문인들이 시를 노래하고 낭만을 즐긴 곳"이라며 "특히, 1955년 천재 화가 이중섭이 이 곳에서 담배은박지에 '소'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그 가치를 몰랐다"고 했다.

향촌동 골목과 북성로가 이어지는 지금의 '명성식당' 자리는 '모나미다방'이었다고 한다. 국회의장을 지낸 시인 이효상이 1951년 이 곳에서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를 열자 구상과 오상순, 조지훈를 비롯한 피난문인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줬다고 전해진다.

향촌동 골목 끝에는 '백조다방'이 있었다. 지금의 '신진이발기구상회' 건물 2층이다. 이 다방은 피아니스트 이공주의 부친인 이상근이 경영했던 곳으로 음악가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김씨는 "다방 단골은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가사로 익숙한 '봄나들이'를 작곡한 권태호였다"고 했다. 권태호는 당시에는 보기 힘든 '그랜드피아노'를 치기 위해 이 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또, 손님들 앞에서 '메기의 추억'을 곧잘 불려 감동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권태호는 향촌동 골목에서 '통행세'를 거둬 담배를 사기도 하는가 하면, 술에 취해 통금에 걸리면 경찰에게 "나는 개"라고 답하며 기어가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1호 음악감상실 '녹향'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향촌동 인근 옛 대구극장 맞은 편에 위치한 '녹향'. 1946년 문을 연 '대한민국 1호' 음악감상실이다. 해방 이듬 해부터 60년 넘게 운영 중인 이 곳은 대구의 명물로 꼽힌다. 전란 때는 구상, 박목월, 양주동, 정비석, 권태호, 조지훈, 유치환, 이중섭 등 수많은 작가들이 찾았고 그 이후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단골이었던 공간이다. 최근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으나 개인과 여러 단체가 경제적 지원을 약속해 다행히 명맥은 잇게 됐다. 녹향으로 가던 중 김씨가 말한다.

"녹향의 DJ가 몇 살이신지 아십니까? 올해 89세입니다. 이창수옹이신데 1946년 처음 문을 열어 아직까지 운영해 오고 계시지요. 고령이신데도 목소리도 또렷하시고 어찌나 정정하신지 모릅니다. 시간이 잘 맞지 않으면 문이 닫혀 있어 뵙지 못할 때도 많은데 한번 가봅시다"

대한민국 1호 음악감상실 '녹향' 내부. 1946년 문을 연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곳을 찾아 낭만을 즐겼다
대한민국 1호 음악감상실 '녹향' 내부. 1946년 문을 연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이 곳을 찾아 낭만을 즐겼다

손 때 묻은 LP판, 오래된 방명록...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공간

다행히 문은 열려 있었다. 10여개의 경사가 급한 시멘트 계단을 따라 내려가 문을 열자, '끼익-'하며 세월을 흔적을 간직한 듯한 마찰음이 새어나왔다. 이창수옹은 "이렇게 찾아줘서 고맙다"며 처음 온 기자에게 둘러볼 시간을 줬다. 무대 앞 쪽 브라운관에서는 웅장한 고전이 흘러나왔다. 주인장의 손 때 묻은 LP판과 손님들이 쓴 방명록, 음악감상 일지 등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자료들이 감상실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러 보기를 10여분. 함께 온 김씨는 "전쟁에 찌든 상황에서도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이 곳에서 시를 쓰고 작사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면서 "녹향은 대구 문화의 밑거름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고 말했다.

2시간 가량 둘러본 향촌동 골목과 북성로. 이 일대는 대구 근현대사의 모습을 그대로 안고 있는 듯 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산업사회, 현대로 이어지면서 이 곳의 문화와 산업은 불꽃같이 흥했다가 사그라졌다. 비록 지금은 상권이동과 도심 공동화를 겪으면서 노인들의 사교장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전후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예술인들이 불살랐던 열정과 낭만의 자취는 곳곳마다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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