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하 제적, 63년 만에 '명예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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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덕(83) 선생, 10일 대구상원고에서...1947년 대구공회당 사건으로 구속


스무살에 제적된 80대 원로가 무려 63년 만에 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야성(野星) 강창덕(姜昌德.83) 선생 / 사진.유지웅
야성(野星) 강창덕(姜昌德.83) 선생 / 사진.유지웅
대구지역 원로 통일.민주인사 야성(野星) 강창덕(姜昌德.83) 선생.

강창덕 선생은 2월 10일 오전 11시 대구상원고(옛 대구상고) 졸업식장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1947년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제적된 뒤 63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6.25한국전쟁이나 6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으로 명예졸업을 한 경우는 많았으나, 해방공간인 '미군정' 시절에 제적돼 명예졸업에 이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강 선생의 명예졸업은 이 학교 총동창회가 학교측에 제안해 이뤄졌다. "평생 항일.민주화.통일운동에 힘쓴 강 선생의 삶을 새기기 위해 뜻을 모았다"고 동문회측이 강 선생에게 알려왔다.



강 선생은 '명예졸업장' 소식에 "평생 생각도 못했다"며 감회에 젖었다.
"반세기 넘게 역사가 흘렀고, 수많은 민주화 물결이 이런 날을 오게 한 것 같다"며 "평생 생각도 못했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단히 흐뭇하다. 동문들과 학교측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명예졸업을 하루 앞둔 2월 9일, 대구시청 앞에서 만난 강 선생은 63년 전 그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63년이나 됐네. 스무살에 제적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1947년 대구공회당 사건

강 선생은 지난 1947년 미군정 시절 '대구공회당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제적됐다.
대구상업중학교(6년제) 2학년이던 1947년 11월 26일, 대구공회당(현 대구시민회관)에서 '전국청년학생웅변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참가한 강 선생은 "남북분단.남한단독선거 반대, UN의 분단음모 규탄"을 주요 내용으로 연설했다. 그리고,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돼 한달동안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뒤 '벌금 5천원'을 내고 석방됐다. 그러나, 다니던 학교에서는 이미 제적된 상태였다.

"그때 난리가 났었지 '대구공회당 사건'이라고. 무슨 언론사들이 주최했는데, 행사 도중에 우익 청년들의 테러로 끝까지 마치지도 못한 채 해산됐다"고 선생은 기억했다. 또, "그 당시에 UN이 남한단독선거니 뭐니 하며 남북분단을 꾸미고 있었지. 그럴 때 내가 분단반대니 유엔음모니 했으니 안잡혀갈 수 있었겠어..."

192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강 선생은, 하양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구상업중학교 2학년 야간부에 편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공회당 사건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다시 몇 년을 공부해 당시 정치대학(건국대 전신) 전문부(2년제)을 졸업했다.

이후, 1956년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에 정치부 기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고 2년 뒤 58년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겼다. 그러나, 1960년 사회당 경북도당 선전.조직위원장을 시작으로, 67년 '반독재 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 추진위원회' 활동과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 93년 경산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항일.민주화.통일...7차례 투옥 13년 복역

강 선생의 저항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평생 항일.민주화.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부터 1982년 출소할 때까지 모두 7차례 투옥됐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을 비롯해 무려 13년을 복역했다.

일제시대 말기인 1944년. 당시 17살이던 선생은 친구들에게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독립군 활동을 얘기했다 '반일사상 고취' 혐의로 구속됐고 45년에는 일본해군지원병 입대를 피해 도피하다 붙잡혀 구속됐다.

선생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47년 대구공회당 사건으로 구속된 것을 비롯해, 52년에는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시 서상일 후보(초대 국회의원) 선거운동 과정에서 '무력통일 반대,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4번째 구속됐다. 또, 61년에는 '반공법 제정 반대' 집회와 '남북학생회담 촉진 시민궐기대회' 연설로 두차례나 구속되기도 했다.

인혁당 '무기징역'에서 민주화.평화.통일운동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조작된 것이라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의 발표에 대해,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강창덕 선생은 "고인들이 저 하늘에서라도 기뻐하실 것"이라며 감격해했다.(2005.12.7일.대구여성회) / 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고문.조작된 것이라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의 발표에 대해,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강창덕 선생은 "고인들이 저 하늘에서라도 기뻐하실 것"이라며 감격해했다.(2005.12.7일.대구여성회) / 사진.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그리고 1974년, 이른 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모진 고문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8개월을 복역했다. 그러나, 지난 2006년 국무총리실 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인혁당 무죄'가 선고되면서 오랜 멍에를 벗었다.

선생은 82년 출소한 뒤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 93년 경산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고 90년대 이후에는 평화.통일운동에 힘을 쏟았다. 지금도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상임고문을 비롯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남북평화나눔운동본부 고문을 맡고 있다.

들풀은 다시 살아나고...

팔순(八旬) 축하연(2008.1.5)  / 사진.유지웅
팔순(八旬) 축하연(2008.1.5)  / 사진.유지웅
선생은 민주.통일운동 뿐 아니라 이 뜻을 펴기 위해 정당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1년 민주국민당 경북도당 상무를 시작으로 , 56년에는 진보당 창당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 경산군 선거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60년 사회대중당(대표 서상일) 창당준비위원, 61년 사회당(대표 최근우) 경북도당 선전.조직위원장을 거쳐, 1990년에는 신민당(대표 김대중.이우정) 중앙위원회 의장을, 91년에는 민주당(대표 김대중.이기택) 당무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도 신민당.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대구경북시도당 상임고문을 맡으며 한국 정치사와 함께 했다.

야성(野星) 강창덕(姜昌德) 선생.
강 선생은 '암울한 시기' 옥중에서 어느 선배에게 '야성(野星)'이라는 호(號)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호를 풀이한 구절을 자주 읊으며 팔순을 넘어서도 '조국의 자주통일'을 수 없이 당부한다.

야초린부생(野草躪復生) 성광야유명(星光夜唯眀)
"들풀은 밟고 밟아도 다시 살아나고 별빛은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 밝고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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