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어느 정도 말을 해줘야 많이 안 맞지. 그러다 전기고문 당하면 죽어요”
당시 집권당과 관련이 있는 김◯◯가 와서 그랬습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이모는 나중에야 학생들을 옭아맬 목적으로 어르고 달래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지난달 사람들이 제법 보는 퀴즈 프로그램에 나왔던 학생이 ‘빨갱이’라는 잘못된 답을 말하자 이마저 시비 거리가 되었습니다. 빨갱이라는 단어는 오답으로도 허용할 수 없는 단어였던 셈입니다. 말 같지 않은 이런 일, 세월이 흘러도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패는지..."
빨갱이라는 말처럼 오랫동안 우리사회에서 전투적으로 너와 나를 구분하는 단어는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곡주사에 드나드는 학생들에게 술과 콩나물국을 먹인 대가였을까요. 대구 곡주사의 이모도 어느덧 광주민주화운동과 무관치 않은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날 두목이라 카면서 두들겨 팹디다. 얼마나 패는지 그냥 맨손으로 볼태기를 때리다가 붕대를 감고 때리고…" 이모는 대공 분실에 잡혀가 보름 정도 고생을 합니다. 거기서 이모는 대학생들이 줄줄이 손을 뒤로 묶여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목격합니다. 그제 서야 이모는 자신이 왜 잡혀왔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 사람 아느냐’고 물을라치면 잡혀온 사람 같으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 물으면 모른다고 답을 하는 식입니다.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그런데 이모 외에 또 한사람의 곡주사 식구가 잡혀들어 옵니다. 이모는 발소리만 듣고도 ‘명희’가 들어왔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명희 역시 얻어맞아 몸을 다치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그러자 명희를 때린 이들이 이모에게 찾아와 명희를 병원에 데려갈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모도 점점 투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고…당신들이 데꼬 가라" 결국 명희를 팬 사람들이 명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곡주사 명희...
명희가 누군지 궁금하지요? 이모 못지않게 곡주사의 애틋한 추억으로 명희를 떠 올리는 학생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명희는 이모가 딸처럼 데리고 있던 어여쁜 소녀입니다. 명희는 일찍이 부모를 여읜 터라 오갈 데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딸처럼 데려다 키웠습니다. 지금은 대전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명희까지 애꿎게도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명희는 학생들의 무던한 벗이기도 했습니다. 수배 당한 학생을 도망치게 할 정도로 학생들과 친숙했습니다. 하루는 곡주사에 온 학생을 잡으려고 경찰이 따라 붙었습니다. 경찰이 이 학생을 잡기 위해 전화로 외부에 연락을 하려고 했습니다. 미묘한 상황을 알아챈 명희가 경찰이 전화를 거는 데 시간을 허비하도록 알게 모르게 전홧줄을 슬그머니 당겨 꾸물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 틈을 타 이 대학생은 재빨리 뒷담을 넘어 YMCA 골목길로 달아나 택시를 타고 빠져나갔습니다.
숨겨주려다...곡주사 앞에 진을 친 형사들
이모는 학생들의 고초에 비하면 자신이 겪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이 도움을 청하면 무엇이든 들어주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한 번은 숨어 지내야 할 학생이 이모를 찾아왔습니다. 아는 절에 소개해주려고 동네 이장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형사가 뒤따랐고 그 학생이 붙들린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도와주려다 되레 피해를 준 것 같아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이모는 학생들을 빼고는 이렇듯 경찰과 자주 부딪혔습니다. 또 경찰서나 분실로 심심찮게 불려 다녔습니다. 반성문 쓰고 벌금을 무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습니다. 새벽부터 곡주사 앞에 형사들이 진을 치는 일은 낯선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험한 말을 듣는 것은 예사였고 식당 문을 닫게 하겠다는 위협에는 ‘살려 달라’고 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군대 간 아들은 '빨갱이'라고...
하지만 더 힘든 것은 아이들에게 무난한 집안의 모습을 보여주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형사들이 수시로 자녀들이 잠자는 방까지 구둣발로 들어와 소동을 부렸습니다. 아들이 군대 갔다가 어머니 때문에 ‘빨갱이’라고 맞아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했습니다.
‘빨갱이 이모’. 이모는 세상이 변해, 더러 대접받은 빨갱이들이 나왔지만 이 틈에 끼지 못했습니다. 그렇더라도 곡주사가 인정한 유공자 자리는 아무나 넘볼 수 없겠지요.
글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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