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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과 인정, 그 시대의 인연...

기사승인 2010.03.24  10: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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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주사 이모 정옥순④ / "찹쌀 동동주 한 사발 먹어봐라, 야"


 
 
▲ 곡주사 이모 정옥순씨 / 사진.박창원
"너들 하나 먹어봐라, 야"
이모가 자주 하던 이야기입니다.

"내 손으로 찹쌀 동동주를 빚어서 학생들에게 한 사발씩 돌리고 싶어. 맛있게 먹고 노래하면서 재미있게 노는 것 보고 싶지. 한데 지금은 다리도 못 쓰고 눈도 어둡고…"

이모는 평생의 애환이 서린 곡주사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합니다. 곡주사 터는 대구지역 한 학교재단과 시유지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년 전 좋은 시절(?) 곡주사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이 나왔지만 그야말로 술자리 이야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식모살이 포장마차, 그리고 '신진식당'

곡주사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은 것일까요. 그리고 이모는 왜 여기서 장사를 하게 된 것일까요. 이모는 경북 상주 모동면에서 태어났습니다. 팔팔하던 삼십대, 이모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갑니다. 이모 스스로 저지른 남녀 인연의 아픔을 피해 간 것입니다. 이모는 처음에 식모살이를 하다 연세대 앞에서 포장마차를 합니다.

독한 마음을 먹고 상경했지만 서울 정착에 실패하고 짐을 싸서 대구로 내려옵니다. 그 때 나이 서른 예닐곱. 이모는 염매시장 골목에서 소쿠리, 그릇 등을 팔던 ‘신진상회’에 전을 폅니다. 이모는 그릇 대신 건어물을 팔았지만 외상 손님이 많아 식당으로 업종을 전환합니다. ‘신진식당’으로 간판을 바꿔 칼국수와 국밥, 잡채, 부침개 등 다양한 메뉴를 내놓습니다. 물론 때때로 동동주도 숨겨 팔았습니다.

음식 맛이 괜찮았던지 손님들이 다문다문 찾아왔고 이름 꽤나 있는 단골도 생깁니다. 이때가 바로 박정희 유신독재가 영구집권을 향해 질주하던 70년대 초반.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시절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자 시국이 더 험해지고 그런 시대를 거부하는 학생들의 발길이 잦아집니다. 달리 말하면 손님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레 이뤄진 셈입니다.

시대를 비틀어 부른 '곡주사'

 
 
▲ 곡주사 이모 정옥순씨 / <영남일보> 2007년 6월 1일자 기사에 실린 사진
그런데 이때도 이모의 술집은 신진식당이었습니다. 당시 이모 식당 주변에는 이런저런 식당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들 식당 중에는 이웃에 있는 대구YMCA의 기독학생연맹 소속 대학생들이 자주 출입하던 식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시대를 비틀어 곡주사라고 이 술집을 불렀습니다. 이를 운동권 학생들이 이어받아 ‘곡주사 할매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모는 김◯◯, 유◯◯ 등이 ‘곡주사 할매집’이라고 종이에 써서 붙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실 곡주사라는 이름은 시대가 낳은 이름입니다. ‘울 곡(哭), 술 주(酒), 선비 사(士)’ 또는 ‘울 곡(哭), 저주할 주(呪), 선비 사(士)’로 불렸으니 말입니다. 아무리 따져 봐도 곡주사는 암울한 시대의 아픔과 분노에 비켜난 주점은 아닙니다.

곡주사는 길게 잡아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중반 사이에 나름대로 진한 사연을 담아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남대 운동권 학생들로 시작된 곡주사와의 소통은 경북대, 계명대 등 대구지역 운동권 학생들의 숨터로 자리를 잡습니다. 독재 타도의 의지를 다지고 민주화를 갈구하는 해방구의 광장이기도 했습니다.

곡주사의 마지막 세대 '성주식당'

곡주사는 간판을 보고 찾던 술집이 아니었습니다. 간판에 상호를 붙인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에 일이고, 학생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불러지며 찾던 술집입니다. 따라서 곡주사 간판을 기억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 '곡주사 할매집' 옛 모습 / 영남일보 2002년 12월 5일자 기사에 실린 사진과 사진설명
혹시나 곡주사 할매집을 ‘성주식당’으로 기억한다면 이는 한참 세월이 지난 뒤의 일입니다.

반월당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땅이 매입되자 선화엄마, 성수엄마가 이모 식당에 합류하게 됩니다. 동업 조건으로 곡주사에 성주식당이라는 간판을 함께 내건 것입니다. 한편으로 보면 비즈니스적인 측면을 감안한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성주식당으로 출입한 학생들은 곡주사의 마지막 세대인 셈입니다.

눈물과 인정, '곡주사' 인연

이모는 그다지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의 삶 역시 굴곡이 많았습니다. 되돌아보면 한이 많이 쌓였을 법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애달픈 일이 곡주사를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모는 곡주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뒤에도 찾아오는 학생을 볼 양으로 식당 방에서 2년 정도 더 지내다 이사를 합니다. 그것으로 40년 가까운 곡주사의 인연은 완전히 끝납니다. 그때 일흔 셋이었으니 벌써 햇수로 4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모는 학생들이 붙인 ‘곡주사’ 라는 이름 때문에 ‘곡주사 이모’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곡주사 이모’ 인생. 그 인생을 이모는 눈물과 인정, 그리고 의리로 붙들고 살아온 것입니다.

빛바랜 이야기 안주 삼아...

이모는 술을 먹지 못합니다. 아니 딱 한 번 마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임ㅇㅇ 학생이 저세상으로 떠났을 때 가슴이 미어터지는 듯해 상가에서 막걸리를 들이켰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모의 곡주사 사랑은 학생들에 대한 그리움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보니, 날 오라 가라 카던 양반들, 높이 됐어요. 어쩌다 경찰서 가서 마주치면 고개를 돌립디다. 그렇지만 얻어맞고 도망 다니던 학생들 때문에라도 민주화 된 거 아이가? 세상 좋아졌으니 이렇게 말이라도 하지.…아이고, 그 양반은 뭐 하러 그리 일찍 갔노? 나도 김해에 갔다 왔는데….”

"이모, 막걸리에 두부김치요" 남산동 단칸방에서 이모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합니다. 올해는 곡주사에서 빛바랜 이야기를 안주삼아 막걸리 한잔 했으면 합니다. 5월이나 6월은 어떤지요?

 
 




글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박창원의 인(人)> 연재를 시작합니다. 사연 있는 대구경북의 어르신을 찾아 그 삶을 매주 이어가려고 합니다.
대구 염매시장 대폿집 곡주사 이모부터 자유당 독재에 맞섰던 투사들까지, 굴절된 역사 삶으로 새긴 그 사연들을 엮어가려고 합니다. 또, 그 사연에 사연이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평화뉴스
 
* 곡주사 외상장부에 이름 올리신 분들, 곡주사 이모와 애뜻하셨던 분들의 사연 기다립니다.
-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421-6151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pnnews@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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