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에 대하여 의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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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장수 /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1.
들뢰즈(G. Deleuz)라는 유명한 철학자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는 일은 좀처럼 없으며, 인간이 생각을 하는 것은 생각하고자 하는 의욕의 고양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충격’때문이다. 이것이 ‘직설’(直說)인지 ‘풍자’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수긍이 가는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복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충격’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조차도 ‘여하튼’ (선별적) 복지를 언급하고 있으니, 일회성 이벤트로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내년 대선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화두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어떤 ‘충격’이 복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생각을 강요했을까? 무엇보다도,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와 그에 따른 양극화가 낳은 결과가 그 이유가 아닐까? ‘비정규직’, ‘88만원 세대’는 이미 옛말이 되어버렸고, 촉망받던 젊은 예술가가 굶주려 죽었다는 소식이 공들여 쌓아올린 ‘G20 의장국’의 명예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도 장사든 막노동이든 어려운 것은 다 해봐서 이미 그쪽 방면으로는 통달해있다는 자칭 ‘서민 생활의 달인’인 이명박 대통령은 기록적 한파를 보인 엄동설한에도 여전히 강바닥을 뒤집고 있으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성장전략의 서글픈 생체기가, 급히 매몰된 살처분 가축의 노출된 주검처럼 여기저기서 묵도되고 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뻔뻔한 성장만능주의자라도 복지를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싶다. 단, ‘이 정도면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대통령의 ‘슬랩스틱 개그’는 잠시 잊도록 하자.

2.
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의 ‘복지논쟁’은 매우 긍정적인 사태이다. 더욱이 이것이 내용 없는 정치구호가 아니라, 세금정책과 관련된 정당 간의, 혹은 정당 내부의 실질적인 정책대결로 진행되고 있으니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허전함을 지울 수가 없다. 복지를 어색해하는 사람이나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대부분 경제발전의 관계에서 복지를 비판하거나 혹은 복지를 옹호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복지는 근로의욕을 약화시키고 윤리적 해이를 낳아서 결국 사회발전을 왜곡시킨다는 비판론자의 판에 박힌 주장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복지 찬성론자들도 ‘보편적 권리로서 복지를 주장’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복지가 경제발전을 저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성장과 복지의 동반성장’이라든지, ‘감세철회 복지확대’의 경제적 효율성 논의를 통하여, 복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복지는 성장이라는 frame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성장을 고려하지 않는 복지는 불가능할까? 한때 유럽 좌파의 새로운 미래상이라고 주장되다가, 결국 신자유주의로의 투항으로 귀결되었던 ‘제3의 길’의 ‘일하는 복지’(welfare to work)가 떠오르면서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다.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라면 독재도 좋다는 위험한 생각이 ‘한국적 민주주의’와 ‘유신독재’를 낳았다면, 성장만 보장된다면 일부 법적․도덕적 의구심은 ‘쿨하게 패스’할 수 있다는 비틀린 욕망이 ‘소통부재’와 ‘민주주의의 희화화’라는 불쾌한 경험을 강요하고 있다. 그만큼 경제발전이라는 담론은 ‘압축성장’(condensed growth)로 유명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가치이다. 다소 과장을 하자면, 그것은 이미 ‘생활 종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복지논쟁’을 새삼 환영하면서도 여전히 어색한 것은, 그 속에서 ‘성장론’이라는 ‘너무 익숙하지만 그다지 친숙하지 않는 것’의 그림자를 목격했기 때문이리라.

3.
‘복지논쟁’을 보면서 일종의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 때,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른 책이 최근에 읽었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이다.
 
더글러스 러미스 / 김종철, 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9)
더글러스 러미스 / 김종철, 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2009)
책의 제목은 지극히 반어법적이다. 저자인 러미스에게 ‘경제성장 불가피론’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어떤 의도를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결론이다. 그는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것이야말로 ‘현실에서 유리된 현실주의’이며, 현대사회 속의 사고장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사고력을 억압하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성장’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근대 역사의 족적은 이러한 거짓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이것에 열광과 추종으로 이어졌다고, 러미스는 지적한다.

경제발전에 대한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나 민족주의나자 파시스트 나치나 레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등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중 어느 것이 경제발전을 가장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20세기의 이들 주요한 이데올로기 간에 의견이 차이가 없습니다.(p. 60)

러미스는 이제 이 ‘익숙한 거짓’과 이별을 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장이데올로기를 ‘당연한 상식’으로 훈육을 받은 세대로서, 그리고 ‘사회주의는 근대화 성장전략이라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와 동일하며, 다만 그 방식만 다를 뿐’(I. Wallerstein)이라는 주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학도로서, 나에게 이 책의 ‘탈성장 선언’은, 마치 20대 초반 ‘공산당 선언’이 그러했듯이, 깨달음과 의아함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4.
러미스는 경제성장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믿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풍경을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규정한다. 여기에는 자연환경의 파괴, 국가폭력, 인간성의 황폐화 같은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성찰의 여지가 없다. 다만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보다 합리적(‘rational’이지 합당한 ‘reasonable’이 아님에 주의할 것)인 수단에 대한 고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은 결국 타이타닉호의 결말처럼 비극으로 치닫는다.

타이타닉 현실주의는 이것과 흡사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가나 경제학자, 비즈니스맨이나 은행가, 그리고 경제발전을 추진하려는 온갖 전문가, 그런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 일하는 방식은 그 시스템 속에서는 매우 정상적이며, 논리적․현실적인 셈입니다. 하지만, 타이타닉호와 같이, 그리고 에이하브의 배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은 광적인 것입니다.(p. 18)

러머스는 이러한 ‘익숙한 비극’의 탄생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1949년 취임연설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이 연설에서는 이전에 사용되지 않았던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나 ‘근대화’라는 항목이 등장하면서, ‘발전’(development)이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재구성된다. 즉 ‘develop’(발전한다)라는 자동사가 국가 A(미국)가 국가 B(미국 이외의 ‘미개발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타동사로 그 의미가 전환되면서, 이후 미국과 UN의 국가정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러머스는 이처럼 ‘develop’라는 자동사가 타동사로 바뀌는 부자연스러운 전환을 통하여, ‘경제를 발전시킨다’라는 훌륭하게 포장된 미국의 국가정책은 ‘미개발 국가’에 대한 착취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취의 대상인 ‘미개발 국가’에도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를 정착시켰다고 지적한다. 그 속에서 발전(실은 ‘착취’)은 “그 사회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땅히 그래야 할 과정이라는 식으로 생각”(p. 70)하게 된다.

자연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나, 혹은 문화나 문명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를 보더라도 그 폭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예로부터 전해져온 한 문화가 눈앞에서 파괴되고, 조상으로부터 전해져온 기술이 없어지고, 음악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집니다. 그것을 보고 ‘발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그런가, 이게 발전인가”라고 체념을 하거나 “서글픈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필연적인 일이다”라는 식으로 생각을 바꿉니다. 경제발전 이데올로기에는 이런 힘이 있습니다.(p. 77)

5.
그야말로 ‘발전’의 가공할 만한 능력이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힘 속에서 ‘미개발 국가’는 서구선진국의 모습을 따라가며 스스로 행복해한다. 그러나 러미스는 ‘가난’은 ‘저발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개발 국가’는 분명히 가난하지만 발전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발전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던 빈부의 차이를 경제발전이라는 정책이 합리화하면서, 이를 통하여 선진국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현태로 변경시켰으며, 이것이 소위 빈곤이 근대화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미개발 국가의) 빈곤은 (선진국의) 경제발전의 기본이자 원동력이 되어 버린다. 결국 ‘발전’이라는 괴물의 정체는 남의 불행을 당사자들에게 굳이 인식시킴으로써, 내가 행복하게 되는 전략이 되어버린다. 단, ‘언젠가 모두가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과 함께.
그러나 러머스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감언이설이다. ‘모두가 경제발전하면 지구가 견디어내지 못할 것’이며, ‘타인의 노동력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부자라면, 모두가 부자는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적 소유제가 유지되는 한, 빈곤은 재생산 될 것’이며, 더욱이 ‘경제발전이 빈부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빈곤을 이익이 발생하는 형태로 고쳐 만드는 빈곤의 합리화라면, 결국 경제발전으로 빈곤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
‘성장’을 비판하는 러머스의 결론은 ‘제로성장’이다. 그에게 제로성장은 ‘엔진 고장’이 아니라 반가운 일이며,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제로가 된 것을 역사적 기회로 삼으면 어떻겠느냐는 뜻”(p. 95)이다. 그러면서 그는 문제의 해법으로서, 성장이 아닌 분배, 즉 경제적인 해결이 아닌 정치적인 해결을 제시한다. 정치학도로서, 나에게 정치적 과정인 ‘경제제도의 민주화’에 대한 러미스의 견해는 곱씹힌다.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 결정, 이 정책은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경우, 즉 그것은 전문가의 결정사항이 아니라 보통의 시민, 인민이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p. 141)

또한, 그는 ‘참다운 풍요’에 대한 인문학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 종합은 ‘대항발전’(counter-develpment)이라는 개념으로 제시된다.

‘대항발전’이란 말에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곧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입니다.(p. 100)

러미스는 부분적으로는 폴라니(Karl Polanyi)를 떠올리게 하는 ‘대항발전’이라는 개념을 ‘줄이는 발전’, ‘경제 이외의 것의 발전’을 추구하는 참다운 의미의 행복주의라고 규정한다. 이를 위하여, 일과 소비의 중독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기계 의존에서 벗어나는 ‘빼기의 진보’를 주장한다.

7.
러미스의 주장은 경제발전과 성장이라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신선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지적한 것처럼 성장이데올로기에 중독된 탓인지, 다소 신비적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이상주의적이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그의 답은 간결하고 단호하다. “사람들이 운동을 잃어도 어떻든 문제는 이어집니다. 즉, 운동이 일어난다거나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 156) 비유하자면,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은 있다’(M. Foucault)는 것일까?

8.
다시 ‘복지논쟁’을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성장론의 바깥에서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정치적으로 분명히 진일보한 사건이다. 이를 폄하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시 ‘탈성장 선언’을 생각한다. 경제발전을 고려하지 않는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경제발전을 무시하는 복지, 즉 성장과의 친화성이 아니라 대항발전-제로성장을 당당하게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복지 논리의 출현은 아직까지는 불가능할까? 그런 복지에 대한 생각을 출현시킬 ‘충격’은 여전히 요원할까?
러미스라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할 것 같다. ‘근원적 결정론’자인 그는 경제를 포함한 사회의 하부구조는 자연이며, 자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자연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의 변화(파괴)는 필연적으로 경제를 포함한 사회의 변화(파괴)를 야기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무시한다고 무시되는 것이 아닌,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현실이 될 것이다. 다만 발전이데올로기는 이러한 파국을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세계의 환경위기가 실제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진지한, 근본적인 해결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 해결책을 제안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는 비현실주의자 취급을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 기묘한 이중사고(二重思考) 상태입니다.(p. 116)

반성장주의와 생태주의로 이어지는 러머스의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지적인 저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장이데올로기 사회에서 그나마 (약간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나는 솔직히 지력도 용기도 모두 부족한 상태이다. 결국 그의 주장 앞에서 지속적으로 주춤거린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러미스의 견해는 새로운 생각을 강제하는 의미 있는 충격임에는 틀림이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복지논쟁’을 보면서 뜬금없이 러미스가 떠오르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책 속의 길] ④
채장수 /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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