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 숨겨진, 구조적 폭력을 들여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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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 『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슬라보예 지젝)


대학에 다닐 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논리학』, 『법철학강요』, 맑스의 『경제철학수고』, 『독일이데올로기』, 『자본론』 등을 읽으면서 정작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찼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저 사상가들의 사상을 모두 이해나 한 듯이 거들먹거리면서 돌아다녔던 객기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 모든 지적 허영심을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 개인적으로 ‘공부’라는 것과 매우 힘들고 고독한 싸움을 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대학 시절 나의 공부라는 것이 한갓 한 줌의 모래밖에 되지 않았음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슬라보예 지젝 / 사진 출처. 한겨레 인터넷(2010.10.29
슬라보예 지젝 / 사진 출처. 한겨레 인터넷(2010.10.29
그런 연유로 지금도 나는 독일 유학생들 중에 공장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해서 철학박사학위를 마쳤다고 하면 믿기지 않는다. 정말 일하면서 공부할 시간이 있기나 했던지(물론 나의 부족한 역량 때문이겠지만). 어쨌거나 그 고통스러웠던 유학 시절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조교로 일하면서 우연히 책을 통해 만난 철학자가 슬라보예 지젝이었다.

그 시절 플라톤, 칸트, 헤겔, 맑스를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읽으면서 헤겔의 ‘법철학’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작성하던 중에 그의 책들을 만났다. 한마디로 그의 책들은 나에게 ‘이해불능’이었고, 그는 나에게 대학시절의 칸트, 헤겔, 맑스처럼 또 다른 ‘언어의 괴물’로 다가왔다.

7년의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다시 만난 그의 책들은 여전히 ‘소통불능’이었다. 물론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원어로 읽지 않고 손쉽게 번역 책을 읽다보니 번역의 문제에서 오는 이해의 한계도 한 몫 했던 것도 사실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 대중문화론, 미학, 정치이론을 경계 없이 자유롭게 횡단하면서 접속시켜 나가는 그의 지적 능력을 보고 있으면 그가 왜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면서 정신분석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바로 그러한 능력은 동시에 ‘현존하는 가장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내가 매력을 느끼는 일차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학문적 동류의식’에 있다. 특히 ‘독일 관념론’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와 관심, 즉 칸트에서 피히테, 셸링, 헤겔에 이르는 저 도도한 사상적 흐름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나의 학문적 방향과도 일치한다. 그는 독일관념론을 되살리기 위한 방법론적 혹은 지적 도구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이용하지만 나는 아직 그 도구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 외에도 나에게 비친 그의 또 다른 매력은 그가 단순한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실천하는 이론가라는 사실이다.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그는 매년 2~3권의 책을 출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에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의 그의 주요 저서들만 보더라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삐딱하게 보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향락의 전이』, 『환상의 돌림병』, 『믿음에 대하여』,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진짜 눈물의 공포』,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지적 능력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찬밥 신세다. 대중들에게는 어느 정도 관심의 대상이긴 하지만, 대학 내에서는 관심 밖이다. 아마도 철학 전공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사이비철학자일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시각에서 그의 철학은 정통이 아니며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시대의 담론을 생산하는 비평가들(문학 비평, 영화 비평 등) 사이에서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지적 능력은 어쩌면 학계라고 하는 제도적 ‘폭력’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폭력’은 이미 태초에도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은 그의 저서 『폭력』에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폭력이 사라지는 유일한 순간은 다만 일곱째 날인 ‘안식일’뿐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가 낳은 형제 중에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 아닌가. 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이다. 카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신(여호와)은 그를 보호한다. 카인에게 표를 주며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복수를 당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서를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신)가 공모한 역사이고, 곧 ‘폭력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폭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된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에서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 발터 벤야민이 1921년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구분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정초적 폭력’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 이전에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슬라보예 지젝 저 | 정일권 이현우 김희진 역 | 난장이 | 2011.01
슬라보예 지젝 저 | 정일권 이현우 김희진 역 | 난장이 | 2011.01
지젝도 폭력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지젝은 최근 2008년에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그의 다른 저서들과 달리 적은 양과 구조적 단순함으로 독자들에게 편하게 접근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부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폭력이라는 주제를 우회하는 6가지의 삐딱한 성찰 이야기로 폭력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우선 1장에서 지젝은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으며, 2장에서 그는 폭력의 궁극적 원인이 공포, 이웃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바로 그 공포가 언어 자체에 내재된 폭력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

이어서 3장에서 테러리즘이 가진 원한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정의란 무엇인지’를 짚는다. 이 때 원한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표를 이루는 데 장애물이 될 법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을지에 더 큰 관심을 쏟아 붓는 도착이 된다.

그런 면에서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129쪽)는 예이츠의 시구는 사태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4장에서는 관용적 이성의 이율배반을 설명하고, 현대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관용에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신적 폭력’ 개념이 가진 해방적 면모를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성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어떤 폭력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 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23쪽)

위 인용문은 이 책 서문의 첫 문장이자 지젝이 이 책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들을 펼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우화이다. 이 우화에서 지젝이 제안하는 것은 ‘폭력을 삐딱하게 보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걸음 물러나서, 가시적인 것이 아닌, 등 뒤에 숨겨진 구조적인 단면을 자르고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펼쳐서 폭력의 원인과 기초를 보여주고, 단면을 잘라 숨겨진 근래에 벌어진 폭동, 테러, 시위의 의미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그는 가시적 폭력만 보지 말고 비가시적 폭력을 보자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디어는 가시적 폭력에만 시선을 끌게 해서 객관적 폭력을 안 보이게 하는 대표적인 구조적 폭력으로 드러난다. 이것은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가시적 폭력은 사실처럼 이야기되나 이것은 이미 미디어 권력에 의해 편집된 것일 뿐이다

이 책에서 지젝이 말하는 폭력은 세 가지이다. 폭력의 주체가 누군지 식별 가능하며, 가시적인 ‘주관적’ 폭력과 폭력의 주체를 알 수가 없으며, 비가시적인 객관적 폭력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객관적 폭력을 다시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지젝은 지금까지 우리가 주관적 폭력만 봤다면, 이제는 객관적 폭력, 그중에서도 특히 구조적 폭력-자본주의 폭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가 여느 철학자들과 다른 모습은 폭력 그 자체에 몰입하여 자신의 정의를 대입하여 드러내는 방식보다는 자신의 정의를 헤겔과 라캉을 경유하여 우화, 시, 문학, 영화, 칼럼, 만평 등을 통해 현란하게 펼쳐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무언가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무수한 이미지들을 끝없이 ‘삐딱하게’ 뒤틀어서 틈새를 벌린 다음 독자들의 직접적인 응시를 통한 깨달음을 요구하는 방식을 취한다. 다시 말하면 삐딱하게 보는 방법을, 다시 보는 방법을, 새롭게 보는 형식을 보여주고자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책의 구성상 부제로 달린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은 꼭 폭력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드러나는 여러 제스처들의 의미를 해석할 때 취해야하는 방법들을 보여주려는 지젝의 의도로 읽힌다. 때문에 이 책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폭력의 ‘구조’이며, 그 구조를 읽어내는 형식이다.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것은 단지 우리가 억압과 착취에 동의했음을 의미하는 형식적 제스처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헤겔이 강조했던 형식의 중요성이다. 형식은 그 자체로 자율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 할례를 받아야만 하거나 어린나이에 결혼을 하는 제3세계의 여성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고통스런 성형수술을 할 수 있는 제1세계의 여성을 비교할 때, 중요한 것은 자유의 형식이다.”(208-209쪽)

따라서 “형식이란 단지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 속에 녹아있는 동적 원리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적 삶에 모종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클로드 르포르와 자크 랑시에르 등이 제기한 반론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노동조합운동이나 페미니즘 등이 제기한 ‘물질적 형태를 띤’ 정치적 요구와 실천의 과정을 추동한 것도 결국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였던” 것이다.(212쪽)

형식 속에 녹아 있고 묻어있는 의미들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읽기 전의 ‘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드러나 있지만 애써 외면했던 그래서 감춰졌던 의미들이 불현 듯 부상하는 순간이 진정한 발견의 순간, 획기적인 돌파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벽을 넘듯, 허물듯 돌파해버리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은 ‘자각할 수 있는 순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습관’으로 이루어진 텅 빈 제스처들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개인적인 지적 해방의 순간은 저절로 ‘자각되는 것’이 아니라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젝은 자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진정한 발견의 순간을 만들고 돌파의 순간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반응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지젝은 이 책에서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독자들에게 진정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맥락과 맥락사이, 행간 사이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방법들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젝이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라는 것이다.(284쪽)

둘째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이 어렵다”는(284쪽)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이다.(293쪽)

지젝에 따르면,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있으며” 그리고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그 맥락에 따라 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비폭력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공손한 미소도 야수적인 감정의 폭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293쪽)

그렇다면 지젝은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와 관련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지젝이 우리에게 던지는 답변은 아마도 “모든 것은 상황에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닐까.
 
 
 





[책 속의 길] 15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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