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이 시대를 향한 고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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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소금꽃나무』(김진숙 저 | 후마니타스 펴냄 | 2007)


쇼는 끝났다. 청문회 쪽집게 과외지침대로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고개 숙인 채’ 말을 잇던 조남호는 다시 세상의 시선 뒤로 도망쳤다. 해고는 그대로지만, 청문회 한번으로 조남호에게 면죄부를 발행한 양 언론과 정치권은 조용하다.

그러나 김진숙은 아니다.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 85호 위에서 희망버스가 처음 시동을 걸기 전 156일동안 홀로 서 있던 그녀. 세상의 귀한 것은 높고 외롭고 쓸쓸하도록 태어났다던 백석의 싯귀처럼 그녀는 높았고, 외로워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높은 곳에서 김진숙은 싸우고 희망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숨어있던 조남호를 불러냈고, 사람들의 가슴 속 흔적으로 남아있던 연대의 불씨를 지폈고, 모든 이들이 사회의 대안을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김진숙은 이 시대의 전선이자 공감의 영토가 되었다.

후루룩 국수 말아 먹대끼 읽어버릴 수 없는 삶
 
김진숙 저 | 후마니타스 펴냄 | 2007년
김진숙 저 | 후마니타스 펴냄 | 2007년
도대체 김진숙은 누굴까. 저 높은 곳에서 홀로 싸움을 시작하여, 수만 명이 모이게 하고, 수 천 만 명이 우리사회를 질문하게 만든 그녀는 누구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소금꽃나무>를 샀다. 책을 주문하고 서울로 갈 일이 있어 기차간에서 책을 펴들었다. 난 몇 쪽 읽지 못하고, 책 뒤쪽에 이렇게 적었다.

"이건 책이 아니다.
내 맘을 둘러 파는 호미거나
피둥피둥 살찐 몸뚱이를 정면으로 찌르는 칼이거나
그래도 괜찮다는 상처의 연고이거나...

후루룩 국수 말아 먹대끼
읽어버릴 수 없는 삶 앞에서
가슴에 자꾸 묵직한 통증이 몰려온다."

그리고는 책을 덮었다. 그 빡빡한 삶을 한꺼번에 읽어버릴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책을 폈다. 물론 <소금꽃나무>에 슬픔과 결연함만 박힌 것은 아니다. 찰진 사투리, 여러 노동자의 삶, 동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연대로 유쾌함이 솟기도 한다. 사는 곳이 대구인지라 경북대병원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김진숙의 칭찬은 마치 내가 칭찬받은 양 입가에 웃음이 스르르 번지게도 만든다. 그러나 유쾌함은 너무 짧다. 그게 오늘 대한민국을 사는 이들의 삶이기에.

난 독서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인다. 얼마 전 독서담당 장학사와 나눈 논쟁도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혀야 한다, 읽은 것이 언젠가는 삶의 나침반이 된다는 게 장학사의 논리였다. 나는 반박했다. 아이들이 웃자란 모처럼, 인생을 알지 못한 채 책만 읽혀서 얻은 단어들은 질감이 쏙 빠져 오히려 독이 된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알량한 사실과 단어들로 마치 세상을 안다는 듯이 행세하는 것, 그건 자칫하면 위선이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고 독서를 깡그리 부정할 수야 없는 노릇. 책을 통해 사회적 공감을 확장해간다면야 더 없이 좋은 일이 아닌가. 문제는 독서가 상상력을 키우고 세상을 만나는 길이라 말하면서 고작 시험점수나 잘 따는 지름길로만 생각하는 것 아닐까.

<소금꽃나무>로 되돌아가보자. <소금꽃나무>는 문자를 재빠르게 읽어내고 줄거리나 찾으면 되는 책이 아니다. 문자들의 모음이라면, 더구나 화려한 문자들을 찾고자 한다면 이 책보다 나은 책이 얼마든지 있다. 열심히 일하고 등에 하얗게 소금꽃나무가 핀 동지들을 보면서, 해고쯤은 웃으면서 해치우고 자기주머니에 두둑이 돈을 꿍쳐 넣는 자본가들을 보면서, 자본가편에 서 있는 정부를 보면서 그녀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이 시대를 향한 고발장이다. 그러면서도 <소금꽃나무>에는 신뢰도 있고, 웃음도 있고, 펄떡이는 삶도 스며있다. 나는 이 책이야말로 학교 교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언젠가 꼭 수업시간 자료로 쓰고 싶은 책, 세상의 본질을 대면한 자의 신뢰, 분노, 여유가 담긴 가장 지적이고 감명깊은 책이다.

누구라도 김진숙의 삶이 있기에...

<소금꽃나무>는 노동자로, 해고노동자로 사는 여자, 김진숙을 보여준다. 그녀가 노동자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니 견뎌냈는지 말해준다. 돈 삥땅치지 않았는지 몸수색당하던 버스차장시절의 일, 차라리 개밥이 더 나을 법한 쇳가루밥의 노동현장, 회사에서 쫓겨나 이십 여년 떠돌아야 했던 삶. 그러나 현장에 가장 깊고 섬세한 뿌리를 내린 삶.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 사진. 김동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 사진. 김동은

나는 이 책에서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를 이어 재생산되는가”를 보았다. 노동자계급의 재생산을 인류학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북으로 올라가버린 남편 때문에 새로 시집온 어머니, 일곱 살에 식모살이 갔던 큰 언니, 부고없이 죽은 노숙인 동생, 집나간 조카, 그리고 해고자 김진숙. 그들 가족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노동자 집안이 어떻게 노동자 집안이 되는지,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내는지 말해준다. 나는 노동계급재생산의 현실을 이처럼 생생하게 들려주는 책은 없다고 확신한다.

<소금꽃나무>에서 또 하나. 노동자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묻어나는 김진숙의 자부심. 나는 노동자로서 가슴을 쫙 펴고 걷는 그녀의 자부심을 본다. 비정규교수노동조합을 만나지 못했을 때 나는 그저 교수 앞에 주눅 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노조를 만나면서 나도 비로소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세상에서 내 분노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분노하라>의 저자가 분노는 자기 자존을 지키는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우리시대에 자부심과 분노를 가르쳐주고 있다.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그녀가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교조교사 하나 만났으면, 세상의 어느 하루쯤은 위로 받았을텐데”라는 고백은 교사의 중요성을 단박에 설명한다. “있는 집안 아이들이 유학 가듯이 집을 나가도 아무도 찾지 않았던” 조카 얘기는 학교가 계급재생산의 최전선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교육이론서, 바로 <소금꽃나무>이다.

그녀의 글을 보고, 몇 번이고 놀랐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다더니, 중학교 때 일기장에 칼을 그렸다가 선생한테 된통 얻어맞은 뒤로 글을 쓰지도 않았다더니……. 그녀의 글은 간결하고 쫀득쫀득했다. 입말에서 글말로 전환은 빠르고 생생하다.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에도 탄복하겠다. 무엇보다 책의 최고 힘은 김진숙의 삶이다. 누구라도 김진숙의 삶이 있기에, 우리들은 공감하고, 연대하게 되지 않을까.
 
 
 





[책 속의 길] 33
이경숙 / (사)지역문화연구 <사람대사람> 연구원. 경북대학교 강사.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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