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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산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열전

기사승인 2011.09.30  09: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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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옥 / 『한티재 하늘』(권정생 ㅣ지식산업사 ㅣ1998)

 

소로우, 법정 그리고 권정생

소유 지향적인 삶이냐, 존재 중심적인 삶이냐? 한 번씩 조용한 숲길을 걸을 때면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이런 거창한 화두를 들고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자동차 소리 들리지 않는 조용한 숲 속의 작은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면 저마다 다른 새소리가 이곳에서 들리다 또 저곳에서 들린다. ‘사아악~’ 소리를 내며 상수리나무 잎이 떨어진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쓰다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모든 것들이 어디선가 왔다가는 잠시 세상에 머물다가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 간다.

존재 중심적인 삶을 지향했던 소로우, 법정, 권정생을 나는 책 속에서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어디론가 사라져 가고 그들의 이름이 적힌 책들 몇 권만 내게 남아 그들이 이 세상에 살았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의 손수 지은 오두막에서 자연주의자의 삶을 실천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내가 태어나기 100년 전쯤, 꼭 지금의 내 나이인 45세에 결핵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소로우를 직접 만나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또 한 사람은 법정 스님이었다. 자연주의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청년기에 출가해 생 대부분을 홀로 산속 오두막에서 수행하며 선택한 가난과 간소함 속에서 본질을 발견하는 삶을 역설했던 그는 당신의 새벽잠을 깨우던 기침으로 평생 시달리더니 지난해 열반에 들었다. 결국, 나는 생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법정 스님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만나고 싶어서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않고 돌아왔던 사람도 있다.

   
▲ 권정생 / 사진 출처. 창비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쓴 권정생 선생은 항상 몸이 아팠기 때문에 사람을 잘 만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2004년 여름에 선생을 찾아갔다. 방문 위에 손으로 쓴 ‘권정생’이라는 종이 문패가 그가 그 집에 살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평소 그의 성품대로라면 문패가 달릴 일은 없었다. 마을 외곽지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그가 손수 종이 문패를 붙인 것은 새로 바뀐 집배원을 위한 작은 배려였다는 것을 나는 뒤에 알게 되었다. 

동네에서 가장 구석진 상여집 바로 옆 버려진 하천 부지에 자리 잡은 7평도 채 안 되는 조그만 흙집이 평생을 병과 씨름했던 당신처럼 힘겹게 버티고 서 있었다. 볼품없는 마당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으며, 마당은 선생이 약용으로 쓰는 듯한 풀들로 우거져 있었고 마당 오른쪽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어둠침침했다.


방문 앞 왼쪽에는 더는 방안에 들여 놓을 수 없는 책들과 온갖 잡동사니가 비를 피하고자 비닐을 덮어쓰고 있었다. 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은둔처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은둔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강아지똥’을 항상 대동하고 다니던 유치원생 아들이 물었다.
“엄마, 동화작가는 돈을 못 벌어요?”

초라하다 못해 궁상맞기까지 한 살림살이에 그저 민망하기만 했던 나는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쓸쓸한 검정 고무신 한 켤레만 바라보다 하릴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구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하였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갔다가 불편하고 쓸쓸한 마음만을 안고 돌아왔던 것이다.

소로우와 법정이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지만, 권정생의 가난은 강요당한 것이었다. 선택한 가난이기 때문에 소로우와 법정이 고결할 수 있었다면, 강요당했던 가난이었기에 권정생의 삶은 차라리 숭고하다. 소유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삶은 실존 그 자체였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허무하고 부조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곧추세우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허무한 존재다. 그럼에도 인간의 유한성과 불안을 초월하여 본래의 자기를 찾아낸 이가 바로 권정생이다.

   
▲ '강아지똥'의 배경 담장 / 사진. 김남옥

그는 고통의 역사 속에 던져졌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분단을 거치고 전쟁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시시각각 끊임없이 침투해오는 병마와 싸웠다. 용케 죽지 않고 칠십 평생을 살아서 이 세상에는 왕자나 공주 못지않은 따뜻한 영혼을 가진 수많은 존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겉으로 보이는 삶은 작고 초라했으나 속내는 한없이 크고 넓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진정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신껏 살았던 사람이 권정생이다. 그는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

빌뱅이 언덕에서 ‘한티재 하늘’을 바라보다

한티재는 대구에서 안동으로 들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으며 사연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 이 고개다. 지금은 고갯마루도 주막도 사라지고 더 깎고 더 넓혀서 그곳이 고개였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다. 다행히 권정생이 쓴 장편소설 ‘한티재 하늘’이 있어 우리네 조상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권정생의 대표적인 작품 강아지똥, 몽실언니가 대중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에 비해 1998년에 2권으로 출판된 장편소설 ‘한티재 하늘’은 비교적 주목을 덜 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평론가들이 이 작품에 그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특이성 때문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은 갈등이 시작되고 깊어져 긴장감이 높아지고 절정에 이르러 결국 갈등이 해소되는 소설의 일반적인 구성을 따르지 않고 있다. 또 사건을 이끄는 주체인 주인공이 없다. 없다기보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 모두가 주인공인 셈이다. 영웅적인 인물도 없고 뚜렷한 갈등 구조도 없고 선과 악의 대립도 없다. ‘한티재 하늘’은 신산한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열전(列傳)이라고 할 수 있다.

   
▲ 권정생 저| 지식산업사 펴냄| 1998
권정생의 장편 소설 ‘한티재 하늘’은 안동시 일직면 평팔, 명진, 광연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 1895년에서 1937년까지 갑신정변, 동학혁명, 명성황후 시해사건, 항일의병 등이 시대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등장인물은 무려 130여 명이고 중심인물도 네 가족으로 정리해도 80여 명에 이른다. 이 소설 속에는 안동 인근 지역에서 살던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이 아프게 그려져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이고 할아버지, 할머니이며 삼촌이고 고모, 이모들이다.

또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떻게든 굶지 않고 살아내는 일 자체가 지상과제였으며 자식을 키워내기 위한 부모 특히 어머니의 헌신과 악착스러움,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서로 보듬어주는 가족애가 슬프도록 아름답다. 남자들은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고 여자 주인공들이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 땅의 여성들일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현실에 있음직한 일을 작가가 상상하여 꾸며 쓴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작가의 어머니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1960년대 안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민요를 직접 채집하러 다니다 만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다가 그때 그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책으로 펴냈다. 당사자들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대부분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허구성보다는 진실성이 더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수없이 많은 작은 사건들이 이리저리 얽히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들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귀돌이와 달수의 사랑, 무엇보다 문둥병에 걸려 소박을 맞은 분옥이와 비렁뱅이 동준이의 사랑은 지금껏 들어본 사랑 이야기 중에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세상에서 버림받은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이지만 둘 사이의 사랑은 순정함과 숭고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동준은 어쩌면 권정생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 군데군데 삽입된 민요들은 애틋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토박이 마을 이름과 '~니껴`형 경북 북부 사투리가 이 소설의 배경이 안동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표준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마는 지금, 이러한 방언이 그 지역의 특성과 정서를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애초 이 소설을 7권 정도 분량으로 기획했으나 병마와 싸우느라 집필을 이어가지 못하고 2007년 5월 17일 별세함으로써 2권에 그치고 말았다. 작가가 피로 찍어 쓴 이 두 권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에 젖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한티재 하늘’이 ‘토지’나 ‘장길산’ 같은 10권짜리 대하 장편소설로 완성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도 힘겨운 삶을 지탱했던 작가를 생각하면 독자의 욕심일 뿐이다. 어쩌면 그 나머지는 작가가 우리 독자와 후배 작가들에게 과제로 남겨둔 것은 아닐까?

권정생은 욕망의 체계인 자본주의의 언저리에서, 자기 인생처럼 못나고 버림받고, 가난하고 하찮은 것들도 쓸모가 있으며 소중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어울리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는 절제, 가난, 욕심이 없음을 무기로 대결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면서 자발적 극빈과 타인에 대한 헌신을 실천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권정생의 삶을 얘기해 주면 그 중의 몇은 묻는다.
“선생님 인세 수입이 10억이 넘는다는데 왜 그렇게 살았어요?”

그 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대답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나는 세속적인 사람이라서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도 않고 살아낼 자신도 없다. 평생 불편한 삶을 살았던 권정생은 자신과 관련된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보이지 않는 과제가 남았다. 생명의 소중함, 소박한 삶, 평화로운 삶, 함께 사는 삶이 그것이다. 욕심이 미움을 낳고 미움이 폭력을 낳는 이 시대에 그는 우리에게 진정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보스러울 만치 어질고 착하기만 한 인물들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너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 큰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은 아닌지, 말만 앞세우고 사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 빌뱅이 언덕에는 쌀알 같은 뼛조각이 뿌려져 있었다... / 사진. 김남옥

   
▲ 쑥부쟁이 / 사진. 김남옥

다시 찾은 빌뱅이 언덕에는 쌀알 같은 뼛조각이 뿌려져 있었다. 또다시 민망하여 몸 둘 바 몰라 하는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연보랏빛 쑥부쟁이들은 가을바람에 이리저리 자유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리움으로 한티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책 속의 길] 37
김남옥 / 국어 교사

평화뉴스 pnnews@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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