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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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익 / 『예수라는 사나이 - 역설적 반항아의 생과 사』 (다가와 겐조 | 김명식 역 | 한울림 |1983)


Ⅰ.
예수 탄생 얘기가 ‘구라’라고?  뭔 소리야, 성탄절이 내일 모렌데!

일본의 ‘발칙한’ 성서학자 다가와 겐조는 복음서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다간 인간 예수를 들여다본다.
크리스마스 특집!  그의 책을 소개(서평 할 재주는 없다)한다.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선구자가 아니다. 역사의 선구자다.”
다가와 겐조는 ‘예수라는 사나이’의 책머리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는 반역의 정신을 가진 역설적 반항아이고 이 때문에 살해당했다고 말한다. 시대의 지배자는 그러나, 역사 속에서 예수를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역사가 선구자의 추억을 완전히 말살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거꾸로 역사가 그 선구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 들이려 한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교조(敎祖)로 삼았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경우이다.”
 
다가와 겐조(田川建三) 지음 | 김명식 역 | 한울림 | 1983
다가와 겐조(田川建三) 지음 | 김명식 역 | 한울림 | 1983
역사의 선구자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육체적” 죽임을 당한 후 체제의 질서 속에 편입되어 그리스도교의 교조가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종교내로 포섭됨으로써 박제화된 예수를 지은이는 “예수는 어떠한 사회에서 살았던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다시보기를 시도한다. 그는 예수의 삶과 활동 그리고 사상을 외면한 채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추상적이고 신학적인 해설에 그치는 신학자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영원불멸의 진리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예수가 살고 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를 파악하려는 의식은 털끝만치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가와는 예수의 발언들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는데 대해 주목하고 예수가 살던 시대에 대한 다양한 문헌을 통한 해박한 지식에 그만의 역사적 상상력을 더해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예수를 파헤친다. 

Ⅱ.
예수의 탄생을 보는 데서부터 다가와는 기존의 신학적 해석에 도전한다. 복음서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포섭하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전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민중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구제자가 이 밤 어딘가에서 탄생해 주길 희구한다. 그는 어른이 아니라 갓난아기라야 한다. 해방은 미래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탄생에 대하여 복음서에 전해지는 얘기들은 이러한 희구에서 나온 산물이다.  “꿈은 시적(詩的)으로 이야기 되어야지 반역으로 장식되어서는 안된다.” 반역자 예수가 살해된 지 반세기가 지나고 그리스도교가 그를 포섭한 후 순종의 아기예수가 탄생 했다는 전설일 뿐이라고 다가와는 예수탄생을 해석한다.

예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런가?
그리스교는 예수의 이 말을 객관적 진리로 설교함으로써 2천년간이나 가난한 자들을 가난한 그대로 누르고 그 결과 부자들의 사회적 횡포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만 셈이 되었다고 다가와는 비판한다.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예수는 제 정신으로 했을까?

이 말이 얼마나 무리한 것이었으면 마태오복음의 저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슬쩍 바꾸기까지 했다. 다가와는 예수가 ‘가난한 자’라고 한 것은 구체적, 현실적 의미로서 가난한 자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의 역설적 반항이라고 해석한다.

빈곤은 고통이고 빈곤이 행복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까지 나서 ‘부자야 말로 행복하다’고 하여 부자가 행복하고 가난한 자가 불행하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어도 좋을 리는 없다. 다가와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게 된다.

‘부자들이여, 행복은 당신들의 전유물이 아니야. 그러니 잘 난체 좀 하지 마!’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하늘나라에 갈 사람은 당신들이야. 그러니 구차하고 힘들더라도 쫄지마!! 죄졌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어느 부자가 예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물었을 때 예수는 ‘당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오’라고 말한다. 다가와는 이 역시 예수가 삐딱선을 탄 것이라고 본다.

‘당신네, 부자들이 유대교 가르침을 그렇게나 잘 지켜왔다고? 그럼 그 딴 거창한 거 말고 갖고 있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스스로 가난하게 살아볼 용기는 있는겨?  봐, 없잖아!’ 라는 냉소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다가와에게 있어 “예수는 인류에게 진리를 가져다 준 사람이 아니다.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진리」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역설적 반항아”였다.

예수의 역설적 반항은 분노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맞아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다가와에 따르면, 여기에는 로마와 유대교의 이중적 지배 속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굴욕적이 일상생활에 대한 분노와 신음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그리스도교의 박애정신의 표현으로 해석되어 고귀한 윤리성의 상징으로 되어 버렸고 바로 그 때 그리스도교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예수의 말은 이렇다.
“권력자들이 와서 때리면 다른 쪽 뺨도 맞아주라구. 어쩔 수 없잖아.”
그런데 이게 설교자의 입에서는 이렇게 된다. “당신들 노예는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맞더라도 화 내지 말고, 원수(인 주인까지)도 사랑하며 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는 주인과 종이라는 당시의 기본적 사회관계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그대로 투영한다. 다가와는 그 결과 “한편으로는 그 계급관계를 완전히 긍정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히 급진적인 발상에서 인간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계기로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해낸다. 하느님 이념으로부터 인간관계가 규정되어 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절대적 군주인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기에 인간 사이에서는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점도 강조한다.

“지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은 절대자인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평등한 존재이다.”

여기에 예수에 대한 민중적 인기의 비밀이 있고 이것이 그의 명을 재촉하게 된다.

「예수라는 사나이」에는 날품팔이 노동자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부리면서 아침 일찍 고용되어 하루 종일 꼬박 일을 한 노동자에게도, 그 이후에 고용되어 몇 시간 일하지 않은 노동자에게도 똑같이 하루분의 임금을 준 데 대해서 다가와는 그 정당함을 옹호하면서 이를 한마디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좋아서, 일하기 싫어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지 못해 주린 배를 쥐고 있는 노동자에게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동등한 임금을 주도록 하는 이 짧은 비유를 인류에게 남기고 간 예수에 대해 그는 “이 하나만으로도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존재로서의 사나이”라고 극찬한다.

그럼에도 지은이는 「고대인」예수의 한계를 본다. 예수는 역사적 존재이다. 다가와는 1세기 팔레스타인 갈릴리라는 변방에서 목수로 살고 있던 인간 예수에 대해 탐구한다. 그런 예수에게 로마제국에 편입된 당시 경제사회구조의 파악을 기대하기란 애시 당초 무리라는 것이다. 예수는 고통 받는 민중(오클로스, ochlos)에 주목하고 정치․사회적 지배구조를 원망하고 이에 분노하지만 그들을 비꼬고 그들의 선의(善意)에 기대는 데에서 나아가 그들에게 저항하거나 변혁의 자세를 취하지 않은 것은 「고대인」 예수의 한계일 수밖에 없다.

다가와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예수가 살아온 구체적 삶과 활동의 결말로 바라본다. 예수는 역설적 반항아로서 “그와 같이 처절하게 살았으니까 그와 같이 처절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Ⅲ.
내가 갖고 있는 「예수라는 사나이」 책 뒷면에는 ‘공법 2. 송해익’이라고 적혀 있다. 대학2학년 때 처음 이 책을 읽었나 보다. 외가, 친가 모두 가톨릭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아영세를 거쳐 한때나마 성직의 길을 꿈꾸었던 대학 새내기의 충격과 혼란이 지금도 선하다. 80년대 초․중반의 시대적 상황에서 무기력하고 비겁하다고 까지 느낀 교회를 보며 심각한 종교적 방황을 겪고 있던 시기였기에 저자 다가와 겐조의 사회학적, 민중신학적 분석에 많은 부분 공감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동안 내 안에 있던 ‘그리스도 예수’는 부정되어야 한다는 섣부른 메시지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나로서는 참 힘들게 이 책을 읽었다.
그럼, 예수는 없는가?

이 책은 1983년 한울림 출판사에서 나온 오래된 책이다. 신학관련 책치고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재미있다. 책 곳곳에 저자의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인간’예수에 대한 탐구가 불편할 수도 있다. 굳이 이 책을 다시 읽고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불신지옥 예수천국’이 거리에서 공공연히 외쳐지는 가운데 헌금액수가 믿음의 척도가 되는 일부 대형교회의 ‘마케팅’대상으로 ‘상품’이 되어버린 이 시대 불쌍한 사나이 예수를 다시 한 번 들여 다 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중에서 절판된 지 오래다. 혹시 4반세기 더 묵은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예수라는 사나이와 설레는 마음으로 만나고자 한다면 먼지 깨끗이 털어서 빌려 드리겠다. 그리고 <평화뉴스>에 감사드린다. 책장 속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누렇게 빛바랜 이 책을 다시 읽을 기회를 준데다 덤으로 20살 청춘의 나와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까.
 
 
 





[평화뉴스 - 책 속의 길] 47
송해익 / 변호사. 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구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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