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거리의 춤꾼이라고 소개하는 ‘춤꾼 박정희’의 사람사는 이야기를 옮겨 적었습니다.)자유롭고 싶어서 춤을 춘다. 자유를 표현하는 내 속에 들어 있는 능력을 이것저것 찾아보니 춤추는 것, 그 이외에 다른 것이 없더라고요. 춤 선생님을 찾아가 춤을 배우고 익혔지만, 이게 춤이야, 왜 이리 즐겁지 않아, 몸과 마음을 옥죄어야 춤이 되나
‘개혁을 외쳤지만 불행히도 개혁집단은 대중을 가지지 못했다. 그 결과 저들은 아주 간단한 상징 조작만으로 개혁집단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끝내는 제거해버린다.’ 프레이리 책에서 읽었다. 지금 우리가 그 지경에 처했다. 대중(시민이라고 해도 되고 민중이라고 해도 된다)의 편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자부했지만, 그런데 우리는 그 대중을 우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겠다는 약속이다. 투명하다는 것은 누구와도 대화할 용의를 표명하는 것이다. 적과도 만나서 풀겠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나라를 투명하게 운영하겠다는 것, 권력을 전횡하지 않는다는 대국민 약속이다. 박대통령의 ‘원칙을 지키는’ 포지션 설정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나대기 좋아는 자
벽을 마주 보고 주먹질이라도 하십시오. 갈구하여 얻은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습니다.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이 행동하기를 간청하며 던진 말입니다.‘그래 지금 독재라도 한다는 거냐,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그만하면 민주주의 됐어. 북한, 무상급식, 다 포플리즘이야. 경제가 나아져야지. 전라도에 몰아주던 것을 이제 경상도 여기 대구로 돌리고 있잖아.
늘 해오든 일, 오늘 새롭게 그 일에 임하는 일상의 삶, 그것만이 인간의 것임을 마음에 새기도록, 그 인간의 것을 놓치지 않고 늘 오늘 해내도록, 여기 오신 모든 분들과 함께, 우리 신부 신랑에게 간곡하게 당부하는 주례사입니다.인간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은 하늘에 돌려주는 지혜, 살면서 때로 그 삶을 멀찌감치 떼어 놓고 바라보는 여유를 부려야 겨우 얻는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그는 왜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국민행복을 약속한 대통령'이 가져다 줄 행복을 기다려야 했었는데.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의 절망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경제 부자 인재 성공 성장 경쟁력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대중의 차가운 무관심이 그의 절망의 깊이였을까? 사람을 몰아치며 이룬 산업화의 전
교사의 학생평가권, 원래 교사의 것이었는데 국가가 그것을 가로챘다. 11월 21일개혁하려고 하는가? 당신의 개혁안에 국민적 동의를 구하려고 하는가? 그렇다면 이 일을 하여 10년 후 달라진 모습을 실감나게, 그리고 그 일에 책임지고 나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선명하게 제시하라. 그들이 책임을 다하는데 필요한 긴급한 제도적 지원이 어떤 것인지를 적시하라. 이런
교사 노릇하고 월급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가? 교육에 대해 말을 한다. 알아듣게 말을 한다. 그 말에 세상이 묻어있다. 그게 사람 노릇 하고 사는 모양새 이다. 사람 노릇이 교사 노릇 보다 먼저이고 그리고 끝이다. 지위를 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위를 내려놓고 누구에게나 통하는 말을 해보라고, 선생님은 간곡하게 당부한다. 선생님의 말은 문장이다. &l
땅과 사람땅과 정의(김윤상. 한티재. 2011)를 읽고 ‘아름다움’을 체험했다는 그런 기분에 젖는다. 글이 전하는 메시지가 좋아서도 그렇지만 물음이 있을 곳에 어김없이 물음을 묻는 글 구성의 문법에 매료되어 더욱 그러하다.정의의 계산법을 사용하여, 자산이 아닌 경작하고 거주하는 땅을 얻고 人才가 아닌 삶의 터를 가꾸는 人材를 얻는다.
왜 검찰 경찰 교육부가 나서는가? 학교(교사)가 나서라. 중심에 서라. 필요하면 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 무슨 일이나 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다. 중심과 주변을 분별하지 못하는 개념혼선이 일을 더 그르친다. 학교(교사)가 교육과 아이들의 문제에 무한 책임을 진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폭력을 ‘교육적’으로 풀어내는 어렵지만 온당한 길이다.
국가의 비도덕과 힘겨운 싸움을 하며 오늘에 이른 거창고등학교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며 그 싸움이야기 보다 그렇게 싸울 수 있는 밑으로부터의 힘을 읽어보려고 했다. 이렇게 읽었다; (공)교육의 전형적 사례이다. 거창학교는 전형적 교육기관일 뿐이다. 유별나지 않다. 유별나다고 스스로를 구별하는 짓을 하며 그 입으로 (공)교육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야만이다.내부의
정규직은 무엇으로 사는가. 비정규직이 겪는 불운을 먹고 산다. 그들의 불운 때문에 더욱 커 보이는 행운을 내심 자랑하며 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편의상 갈라놓은 분류법이 아니다. 엄연한 사회적 사실, 우리사회를 이해하고 변혁하는데 그것 빼고 다른 것이 없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정규직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정규직이기 위해 기
아직도 차가운 초저녁 강가에서 소지장을 불살라 하늘로 올리며 두 손을 모으는, 하늘에 닿고야말 어머니의 그 간절함에 나도 따라 두 손 모아 절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두 손은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엊그제 어머니를 속여 먹은 짓이 어찌나 선명하게 다가오는지. 이 희한한 체험 때문인지, 나는 살면서 큰 죄를 지었다 싶으면 으례껏
‘전교조가 배후야, 여의도에 모인 아이들 수가 청계에 모인 수보다 많은 거 보면 알잖아. 여의도 그 쪽에 전교조가 세다’. 촛불 문화제에 대처한답시고 모인 전국교육감 회의석상에서 서울교육감이 보여준 세상 보는 안목과 돋보이는 분석력이다. 지방교육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듣고 있었을 터인데, 어쨋든 그들의 안목과 분석력은 그들의 인격이 아니라 한국학교라
내일 지구가 파멸한다고 해도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도덕주의자에게 삶의 무게는 얼마쯤 될까. 파멸한다고, 그렇다면야 열려 있는 사과를 마저 따먹겠다는 실용주의자에게 삶은 얼마나 가벼운 것일까. 숭고의 미 말고는 사과나무 심는 삶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세속적 몸의 언어를 내세우는 실용주의자한테서 훨씬 진한 사람냄새를 맡는다. 지키지
새해를 맞이한다. 전에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적어도 내게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올 새해를 맞이한다. 옷을 두텁게 갖추어 입고 지묘 왕산에 올라 간절한 마음이 되어 소원한다.'사람을 표준에 맟추어 배열하기 좋아하는 전문가적 잔재주에 대못질 할 수 있기를, 저의를 캐고 다니는 짓일랑 거두어들이고 사물을 사물로 관념을 관념으로 욕망을 욕망으로 꼭
2008대입제도 개혁에 관여하면서 무엇을 하고자 했을까. 문자 그대로 학교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했다. 학교는 커리큘럼에 의거한 교육활동을 하도록 조건을 정비하고 여건을 조성해 놓은 환경이다. 커리큘럼이란, 학습 체험 상황을 만들어 그 속에서 이해와 태도와 기능으로 구성된 능력(합리적 정신)을 기르게 하는 교육학적 장치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커리큘럼을 공공
목적을 또렷이 한다는 것은, 그 목적에 이르는 과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역으로 그 사람이 일하는 과정을 짚어보면 그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가늠할 수 있다. 목적과 과정을 교차 음미할 수 있을 때 그 목적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고 그리고 과정의 성실성을 인정할 수 있다. 교차 음미, 다시말해 목적을 보고 과정
스스로 생각한 바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사람을 여기저기서 만나고 싶다. 시급한 현안에 생각을 집중하고 그 생각한 바를 굽힘없이 말하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대통령이 그렇게 하면 너도 나도 그 현안에 생각과 말을 보탤 것이고, 실질을 담은 생각과 말이 쌓여서 통일이니 군축이니 하는 우리사회의 근본을 건드리는 결과에 이르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이 흐름을
정치와 철학을 대조하여, 흔히 정치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고 철학은 상대를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정치는 있어야 하겠고, 그래서 상대를 죽이는 짓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기 위해 최선의 것이 아닌 차선의 것을 찾는 대화로 상생하는 것이 정치의 정도라고 했겠지. 그런데 상대를 완전히 죽여 완승해야 직성이 풀리는 패도의 정치가 정치권을 넘어 기업에도 교육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