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학원 산하 대구대는, 88년 이후의 총장 장기부재에 따른 경영난맥으로 1993년 임시이사가 파견된 후, 17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적 재정적 규모 상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총장 직선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적 경영방식이 안정적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학원의 안정적 발전을 근거로 교과부는 2006년 대구대를 임시이사 파견 사유 해소 대학으로 분
우시장의 추억예전에는 하양 시장 한 모퉁이에 우시장이 있었다. 장날이면 순해 터진 소들이 팔려갈 때를 기다리며 슬픈 냄새를 뿜어냈다. 이제 거기 질척하던 흙바닥에는 말끔한 시멘트 포장이 깔리고, 소들이 웅성대던 자리에는 자동차들이 빈틈없이 들어찬다. 정겨운 소 울음소리와 껌벅이는 소의 눈빛 따위는 망각의 공동묘지 어딘가에 묻혀 가고 있다. 그 사이에 우리
암울한 시대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암울한 한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용산참사가 있었다. 누구를 위한 공권력이고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정치철학적 사건이었다. 죽은 이들이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건만 봄이 오자 새싹들은 어김없이 솟아났고 꽃들은 흐드러졌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인간미 넘치던 전직대통령이 자살로 내몰리는 흉흉한 사건으로 온
세상살이가 너무 빡빡하면 하루하루 연명하는 데에 급급해 아무 생각도 하기 어렵긴 하지만, 그럴수록 지금과 다른 멋진 세상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형이상학적 본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형이상학적 본성은 종교로 예술로, 아니면 형이상학적 이상국가론으로, 또 아니면 다양한 변혁적 실천과 이론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상세계에 대한 구상으로는 모어의 유토피아나 푸리에의
희망이 보인다김대중 집권 이후 진보 개혁 민주 세력의 기세는 꾸준히 잠식당해 왔다. 독재정권에 맞서는 것만으로 일단 정당성을 벌고 들어갔던 그 이전과 달리, 이제 조금씩 가진 것이 늘어나 조심스러워지기도 했고,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목에 힘을 주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혐오감을 사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수세적이었다. 반면에 조중동을 앞세운 수구 보수 쪽
연쇄살인범 이야기로 연일 매스컴이 떠들썩하다. 한동안 잠자고 있던 사형제를 다시 끄집어내자는 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사이코패스 유형의 범죄 증가에 대한 걱정 어린 관심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힘없는 여인들의 목숨이 개인의 순간적 쾌락을 위해 허망하게 희생되었다는 점 때문에 힘없는 시민들의 안타까움과 분노가 각별한 듯하다.힘없는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짓은
근래 우리 사회를 10여년 이전으로 돌려놓은 범사회적 단기 기억손실증 때문에 종종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설혹 성장의 추억과 패권의 욕망에 밀려 기득권의 횡포를 끊임없이 망각하는 이웃들과 레너드의 모습이 자꾸 중첩되더라도, 우리는 그래도 레너드보다는 훨씬 더 체계적이고 풍부한 기억장치들을 활용할 수 있다고 좀 바보처럼 뿌듯해 해도 되지 않을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 동안 꿈꿔온 일들을 하나하나 회심의 미소를 띠며 추진하고 있다. 그 추진력은 이미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다. 촛불이 바다를 이루든 말든, 중고등학교 학생들만 아니라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감히 대통령을 조롱하고 욕하든 말든 아랑곳없이, 미제 쇠고기는 수입되고, 남북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닫고,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
서울의 밤거리가 촛불로 뒤덮이자 머리를 조아리며 ‘반성’과 ‘사죄’를 입에 담던 정부가 다시 ‘엄정’이니 ‘강경’이니 하는 살벌한 단어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경찰의 실제 진압작전은 그런 말들보다 한참 더 살벌하다. 아무 저항도 못하는 여학생을 군화발로 무참히 짓밟는 장면은 이미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현 정부의 반인권적 반민주적 본색을 고스란히 드러내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결과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심상치 않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이명박 대통령 탄핵을 위한 국민서명은 벌써 백만을 훌쩍 넘어섰다. 두 차례의 대규모 촛불행사가 열리자 정부는 불법이니 사법처리니 정치공세니 하며 여론을 눌러보려 하지만 민심이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촛불행사는 또 열리고 탄핵서명도 천만 명을 목표로 계속될 예정이
이연걸의 무술동작들은 보통사람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주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 자체는 대부분 그저 그런 오락영화 언저리에서 맴돈 것 같다. 그런데 근래에 나온 진가신 감독의 [명장]은 씁쓸하면서도 꽤 강렬한 여운을 던진다. 태평천국의 난으로 어지러운 청말, 지원부대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부하들을 모두 잃고 혼자 살아남은 패장 방청운(이연걸)은 산적
서구식 숫자미신에서는 럭키세븐이 지존으로 군림해왔고 삼삼칠도 곧잘 튀어나오지만, 선거철이면 뭐니뭐니 해도 51처럼 짜릿하고 매혹적인 숫자도 없을 것이다. 51이라는 매직넘버 밑바닥에는 가난뱅이든 부자든, 착한 사람이든 사기꾼이든, 진보든 보수든 가리지 않고 일정한 형식조건만 갖추면 누구의 표라도 공평하게 하나로 대접해주는 민주주의의 숫자원리가 자리잡고 있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은 케케묵은 헤겔식의 사고방식을 연상시킨다. 헤겔 철학의 주요 개념인 ‘역사이성’이나 ‘절대정신’ 따위를 입에 담는 사람은 이제 대학가에서조차 찾기 어렵다. 그런데 어쩐지 대선을 코앞에 둔 요즘 그것들과 비슷한 어감을 풍기는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떠오른다. 상식에 비춰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벌어질 때에는 그 상식이라는
벌써 친숙해진 그림이라서 그런가, 노무현-김정일의 악수는 김대중-김정일의 포옹처럼 국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도 각별한 충격을 주지도 못한 것 같다. 당연히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대통령 내외가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는 장면 혹은 그 밖의 어느 광경에서든 분단의 비극과 얽힌 각자의 체험을 돌아보며 모종의 감동과 회한을 느낄 수도 있을
온 식구와 휴가 온 친척집 아이들까지 데리고 ‘화려한 휴???보았다. 방학이라는 핑계로 공부와 한참 담쌓고 노는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현대사 공부라도 조금 시켜볼 작정이었다. 예상 밖으로 아이들은 졸거나 몸을 비틀지도 않고 끝까지 영화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듯했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은 아이들 눈을 피하며 수시로 눈물 훔치기에 바빴다. 이미 30년 가까이
대선이 다가오면서 정치판이 은근히 재미있어진다. 한 동안 잠잠하던 노대통령이 작심하고 한나라당 대표주자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한미 FTA,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미군기지 이전 등 주요 대목에서 한나라당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연정까지 제안했던 여권의 정책기조에 비춰보면 조금은 어지럽다. 그래도 대운하의 허구성이나 독재자의 딸을 겨냥하는 노골적
지난주에는 학생들 엠티 덕분에 오랜만에 경주 구경을 했다. 관광지라는 고정관념과 무관하게 살기 좋은 동네 같다. 전봇대와 전깃줄의 압박 없이 맘껏 자라는 길가의 벚나무들이 매력의 주요 원천이었다. 헌데 경주를 빠져나오는 길에는 아름드리 가로수 여러 그루가 잘려 밭둑에, 논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또 길을 넓히려고 하는지, 아니면 가로수 그늘을 미워하는 땅임자
옛날은 흔히 실제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했던 군대생활조차 한참 지난 다음에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되어 있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보려고 노력해도 아름다워지기 어려운 괴로운 경험들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런 것들을 입 밖에 꺼내기조차 싫어 의식 저 밑바닥에 감추어두곤 한다. 그럴수록 그로 인한 마음의 병은 또 다른 불행의 원인이
월요일은 ‘주몽’ 보는 날이다. 기말고사를 코앞에 둔 아들 녀석도 한사코 보겠다고 끼어든다. 확실히 재미는 있다. 우여곡절 속에서 쌓여가는 주몽의 성공사례들이 재미의 원천일 것이다. 주인공과 그의 동료들만 아니라 그와 맞서는 대소와 그 주변의 주요 인물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정당성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갈등을 빚어낸다는 점 또한 재미의 본질일 듯하다.
북한 핵실험 관련한 논란 속에서 나처럼 순진한 백성들은 논리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왜 미국은 천 번이 넘는 핵실험을 했고 만 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데 그 누구도 미국의 핵무기를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북한의 핵무장을 비난하려면 미국이나 러시아를 비롯한 타 핵보유국들의 핵도 함께 폐기하라고 소리쳐야 앞뒤가 맞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