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버려둔 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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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 | 이한종 옮김 | 한겨레출판사 | 2010)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재작년 나는 이 책에 홀렸었다. 책을 읽던 중, 급히 약속이 생겼다. 책은 마저 읽고 싶고, 약속은 있고.... 운전석 옆자리에 책을 실었다. 잠시 빨간 신호등에 차가 멈췄다. 얼른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안달하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나는 이 책에 환호했다. 80년 전, 영국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 책. 지금 생각해도 여태 읽은 르포 중 최고의 르포였다. ‘아, 르포를 쓴다면 이렇게...’ 르포를 써볼까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게 했다. 르포, 현장을 가서 보고 쓴 보고형식의 글! 르포는 현장을 체험한 글이라 생생하다. 그래서 독자를 끈다. 현실 속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글이다. 그러나 르포는 조금 읽다 보면, 내가 알거나 또는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이라 심드렁해지기 십상이다. 또는 불편하기만 할 뿐,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는 반발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내게 계속 흥분이었다. 이 책은 부정과 고발, 그리고 희망과 대안이 어떻게 한 자리에 소복하게 든 글을 쓸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조지 오웰이 영국 북부 노동자 문제를 다루면서 진정으로 찾아내고자 했던 것, “똥덩어리에 묻혀 버린 다이어몬드”, “정의와 자유”였다.

한 잡지사의 요청을 받아, 조지 오웰은 영국 북부 노동자들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1936년 위건, 리버풀, 세필드로 갔다. 이 책의 제목, <위건 부두로 가는 길>도 그렇게 해서 나왔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 | 이한종 옮김 | 한겨레출판사 | 2010)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 | 이한종 옮김 | 한겨레출판사 | 2010)
조지 오웰은 탄광 노동자의 막장에도 들어가고, 노동자들의 집에도 간다. 갱을 내려가는 일만으로도 오웰은 죽을 지경인데, 막장의 광부는 그건 일의 시작도 아니라니... 또 오웰은 안주인에게 식료품 비용을 적어달라고 해서 낱낱이 기록하기도 하고, 삶을 박탈한 노동자 주택정책을 비판하기도 한다. 실업자들이 어떻게 사는지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노동자의 삶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사회주의가 경제문제로 다 귀결되지 않는다며 마르크스를 비판하기도 하며, 생애 내내 경계했던 파시즘 문제도 다루었다. 대목대목 감탄을 쏟아내게 하는 묘사력, 그리고 역사를 보는 혜안, 가난한 중산층인 자신과 노동자의 삶을 밀착시켜 글을 끌고 가는 힘. 그런 능력이 80년 전 것인데, 나는 탐나고 탐난다. 그러나 나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소개하는 글을 쓰려는 건 아니다. 그냥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빌어 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1. 주변을 삭제하고 산다.

40여년 주택에서 살았다. 최근 몇 년 아파트에 더부살이 중이다. 아파트로 옮겨오면서, 더구나 차가 생기면서 잃어버린 것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어느새 주변을 다 지워버린 것이다. 특히나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들은 남김없이 모두 다. 아파트에서 차를 끌고 나와 바로 목적지로 가서 원하는 것만 취하는 삶의 방식. 주변은 없고 나와 목적만 있는 가장 효율적인, 그래서 성공에 가까워지는 삶의 방식이 내 삶이 되어버렸다.

꼬불꼬불 골목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고, 빗물이 튀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길. 밤이 되면, ‘우리 사회에서 여자는 익명의 테러에 늘 노출당하고 사는거야’라고 씩씩대며 헐레벌떡 달리듯 걷던 어둔 골목길. 새벽녘 깡마른 몸에 반으로 확 접혀버린 허리로 리어카를 끌고 휴지를 찾아다니는 할머니, 위태위태해 보이는 저 깊은 구멍가게, 그 모든 길을, 주변을 보지 않을 수 있다. 어쩌다가 걷는 길은 고작 ‘웰빙’이니 ‘힐링’이니 ‘걷기 열풍’이니 하는 것에 맞춰진 잘 짜여진 길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경쾌해지는 산뜻한 길들. 그 길에는 삶은 싹 거둬들이고, 여가, 웰빙, 힐링, 사색, 건강 그런 고상함만 있었다.

2. 어느 날 골목을 걸었다.

경북대 동문 부근으로 사무실을 옮긴 후. 사무실에서 나와서 하릴없이 동네를 걸었다. 저녁 먹고 그저 휘 한바퀴 돌았다. 학교 교문 앞 아스팔트를 따라 늘어선 큰 상가들, 그 뒤로 한 달에 월세 3, 40만원하는 최신식 원룸들이 새로 들어섰다. 그리고 원룸이 끝나는 지점의 뒤, 아님 그 안. 아직 골목길은 남아있었다. 80년대 말, 대학교 주변에서 사찰하는 사복경찰을 피해서 수배자 선배들이 사라지던 그 어지러운 골목. 아직도 그 골목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누구 말로는 한국전쟁 때 만들어진 골목이라던데, 그 시초야 알 길 없지만, 요지경처럼 이어지는 골목길들. 골목은 덩치 좋은 사람이라면 한 사람 어깨만으로도 비좁다. 골목에는 촘촘히 대문이 연결되어 있다. 옆집에서 부부싸움이라도 할양이면, 고함소리를 피하기 어려운 곳. 골목길에는 담장을 따라 물 빠진 티샤츠며 몸빼 같은 빨래가 널려 있다. 골목은 이리 저리 엉켜 길을 잇고 있었다. 돌고 돌아 골목길이 끝날 무렵의 어느 집, 벌건 쇳가루를 토해내며 무너져 내리는 철문 너머로 와르르 쏟아져 나온 붉은 장미들. 이 집도 곧 개발될 모양인가 보다. 이 골목길도 점점 잠식될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잃어버린 골목, 묻어 두었던 주변을 떠올렸다. 내 주변의 ‘위건 부두’들에 눈 감고 장님처럼 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님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위건 부두’인데도 나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나의 삶에 대해서는 입 닫고 성공을 쫓아가는 건 아닌지 묻는다.

3. 오웰의 고민, 얼마나 노동자계급이 될 수 있는가.

오웰은 노동자들이 더 잘 살아야지 하는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니까.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모든 걸 그대로 누리기 바라면서? 그래서 오웰은 다시 이렇게 묻는다. 제국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과연 진정 대영제국의 해체를 원하는가(당시 영국은 식민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영국에 앉아 딸기 아이스크림 먹을 때 인도의 수 백 만 명이 기아선상에 허덕인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게 과연 반제국주의인가라고 묻는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어도,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중에서)

오웰은 이튼스쿨을 다녔던, 가난한 중산층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반성한다. 그리고 사회에 진심으로 차별철폐를 원하는가 묻는다. 시민단체에서 일 했던 한 후배. “내게 빚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월급이 얼마냐고 그걸로 살아갈 수 있냐고 묻는 사람도 없어요.” 그저 허허 웃으며 술 한 잔 사주면서 나라 걱정 하는 몇 마디 말로 온갖 진보의 깃발을 펄럭이고 있지는 않은지.

4. <대구로 가는 길>은 안 될 까.

대구의 아이들이 스스로 죽었다. 고작 십년 조금 더 살았을 뿐인데. 그리고 남은 아이들은 카카오톡으로 “아파트 옥상에나 올라갈까”라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학교는 그런 문자들이 오간 걸 알면 기겁을 한다. 교장은 교사들에게 ‘아이들과 상담하고 반드시 기록을 남겨놓아라, 그래야 학교가 무사하니까’라고 말한다. 아, 대구. 조지 오웰이 영국 북부 지방으로 떠나 기록했다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대구에는 누가 와서 <대구로 가는 길>을 기록할까. 몇몇 언론에서 대구의 학교현장을 기록하는 글을 최근에 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영 갈증이 풀리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탄광에도 들어가고, 집 거실에도 들어가고, 함께 밥도 먹고, 싸구려 여인숙에서 머물기도 하며 기록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이 책처럼, 대구도 대구의 삶을 샅샅이 뒤적이고 기록하고, 대안을 찾는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지 않을까.
 
 
 





[책 속의 길] 71
이경숙 / (사)지역문화연구 <사람대사람> 연구원. 경북대학교 강사.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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