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련은 강물 위에 일렁이는 잔물결일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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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 『한밤중에 잠깨어』(한시로 읽은 다산의 유배일기) 정약용 | 문학동네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한번쯤 좌절의 시간이 찾아온다. 예기치 않은 상황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답답해하며, 세상을 원망한다. 조선의 큰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조정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권력자에서 하루아침에 대역죄인, 유배자 신세로 전락한 다산이다.

  다산의 생애는 누구보다 드라마틱했다. 정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호시절을 구가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난 뒤 그의 인생은 완전 뒤바뀌었다.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2번 유배당했다. 다산은 1801년 3월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가 그 해 10월에 서울로 압송됐고, 같은 해에 다시 강진으로 유배됐다. 이때 참혹한 죽음을 간발의 차로 피하기도 했다.
 
『한밤중에 잠깨어』(한시로 읽은 다산의 유배일기) 정약용 지음 | 정민 엮음 | 문학동네 | 2012.6
『한밤중에 잠깨어』(한시로 읽은 다산의 유배일기) 정약용 지음 | 정민 엮음 | 문학동네 | 2012.6
  ‘한밤중에 잠깨어’는 다산이 유배지에서 쓴 한시 중에서 자기 독백에 가까운 것들만 모아 다산의 시점에서 일기 쓰듯 정리한 것이다. 낯선 유배지로 쫓겨 간 다산이 느꼈을 비애와 허탈함, 배신감과 자조감이 마치 독백과도 같은 시편에 담겨 고스란히 전해진다. 절해고도와 같은 유배의 땅에서, 믿었던 벗들마저 등을 돌린 한탄의 세월을 견디며, 다산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시편들은 마치 고통을 승화시켜 피워낸 한 송이 탐스런 ‘꽃’ 과 같다.

  “취한 듯 술 깬 듯 반평생을 보내니/ 간 곳마다 이 몸의 이름만 넘쳐난다./ 온 땅 가득 진창인데 갈기 늦게 요동치고/ 하늘 온통 그물인데 날개 마구 펼친 듯해./ 제산에 지는 해를 뉘 묶어 잡아맬까./ 초수에 바람 치니 마음대로 갈 수 있나./ 형제라도 운명이 다 같지는 않은 법/ 우활하여 물정 모름 혼자서 비웃누나./”(‘정약용, 自笑 10-1’)

  인생의 바닥까지 떨어져본 사람은 안다.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암흑속이라도, 바닥을 치고 나면 비로소 세상만사가 또렷하게 보이면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다산 역시 조정에서 권세를 누릴 때는 몰랐던 것들을 유배생활에 들어서야 비로소 냉정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다산은 잘 나가던 시절의 자신을 두고 “제 이름에 제가 취해, 취한 술 깨기 전에 또 한 잔을 걸치며 살아온 꼴”이라며, “하늘에 온통 그물이 가득한데 제 날개만 믿고 함부로 날다가 그물에 걸린 새가 바로 나다”라며 뒤늦은 한탄을 하기도 한다.
 
  혹독한 유배생활에서 다산은 일생의 역저들을 탄생시켰다. 그는 유배 18년 동안 육경사서와 정치, 경제, 행정, 역사, 지리, 언어, 국방,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500여권이 넘는 저서를 남기는 등 놀라운 학문적 위업을 달성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그의 대표 저작물이 모두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올해는 다산이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네스코는 ‘2012년, 올해의 인물’에 루소, 헤세, 드뷔시와 함께 다산 정약용을 선정했다. 유네스코는 “다산은 매우 중요한 한국의 철학자”라면서, “그의 업적과 사상은 한국 사회와 농업, 정치구조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주역에 ‘감지’(坎止)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물이 흘러가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다 채워 넘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다.

  경박하고 혼탁한 날들의 연속이다. 이른 아침 신문을 펴면 고귀한 생명들이 극단적 결정을 하고, 인륜을 거스르는 파렴치 사건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힘겨운 장애물도 만나고, 스스로 감당하기 벅찬 순간도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가만히 스스로를 내려놓고, 다산의 유배일기를 일독하기를 권한다. 꿋꿋하고, 반듯하게 한 시대를 지나온 다산의 올곧은 삶이 해답이 될 것이다.
 
 “말이 참 무섭다. 유언비어가 한번 돌더니 잠깐 만에 거짓이 진실로 변한다.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돌팔매질부터 한다. 한꺼번에 내게 쏟아지던 비난과 돌팔매질을 원망하지 않겠다. 변명하지도 않겠다. 그들도 겁이 나 그랬던 것이지 내가 미워서 그랬겠는가? 하늘 뜻이려니 하겠다. 북극성은 어제와 같은 자리를 지키고 떠 있다. 서강의 풍랑은 잠시도 잘 날이 없다. 내가 겪는 시련은 강물 위에 일렁이는 잔물결일 것이다.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북극성이 있는 한, 잔물결에 마음 빼앗기지 않겠다. 저 드넓은 바다를 보아라. 서강의 풍랑은 그 앞에선 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바다의 마음을 배우겠다.” (다산, 自笑 10-10)
 
 
 





[책 속의 길] 80
김은경 / 영남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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