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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힘, 연극

기사승인 2013.05.10  09: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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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열 /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아우구스또 보알 | 헨리 토러 엮음 | 김미혜 옮김
| 열화당 펴냄 | 1989)


"야 임마. 무슨 책인지 꺼내 봐!"

가슴이 조마조마해집니다. 불시에 중대장이 직접 내무검사를 하는 것이라 내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리 숨겨두지 못한 불찰을 탓할 겨를도 없이 낚아챕니다.
"연극론? 너 학교 다닐 때 연극했어?"
"네..."
"짜식 별것도 아니구만 왜 쫄아? 연극할 때 뭐 했어?"
"스텝도 하고... 배우도 하고 여러 가지 했습니다"
"그래?"


쳐다보는 중대장과 일직사관의 눈이 생각보단 부드럽습니다.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중대장은 책을 들춰보지 않고 돌려주며 다음 병사에게 갑니다. 다시 한 번 안도의 숨을 쉽니다. 다쓴 달력으로 표지를 싼 책을 몇 페이지만 넘기면 '민중연극론',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 등 당시로서 예민한 언어를 발견했을 텐데 조악하게 볼펜으로 쓴 제목만 보고 넘어간 중대장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내용을 알아채고 문제 삼았다면 보안대를 들락거리며 힘든 군 생활을 했을 터입니다.

1985년 어느 날 저녁 전방의 군내무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첫 휴가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던 술자리에서 어느 선배가 책을 한 권 내밀었습니다. 복사를 하던 선배를 통해 만들어진 그야말로 그 당시 값싸게 구해보던 복사본 책이었지요. 내용을 들여다 본 저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삼엄한 '신군부'의 서슬을 '예술'로 저항하려 고민하고 노력하던 때에 멀리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이루어진 민중을 위한 연극 활동 메소드(method)을 기록해 놓은 그 한 권의 책은 정말 가문 날의 단비와 같았지요.

연이은 술자리에 자세히 탐독하지 못하고 귀대하던 날 저는 그 책을 귀대물품에 포함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겉표지와 속표지를 찢어내고 달력으로 표지를 다시 입히고 평범한 책으로 위장을 해서 들고 간 책이 바로 아우구스또 보알의 <민중연극론>으로 "피억압자들의 연극"이란 부제가 달려 있었지요. 열화당에서 이 책을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이란 이름으로 펴낸 게 1989년이니까 정식 발간되기 전에 이미 책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린 셈이지요. 어떤 연유로 그 책이 미리 유통될 수 있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시절 중요한 문건이나 금지된 서적은 카피본으로 미리 유통이 된 적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억압받는 자들의 연극』(아우구스또 보알)
그 책은 문화예술운동으로 시대의 양심을 따라가고자 노력했던 어린 연극쟁이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책이 되었습니다. 정통연극을 주로 공연해 온 극예술연구회 동아리의 분위기에서는 민중적 연극의 철학과 문화적 방법론, 메소드를 기록해 놓은 이 책은 정말 신선했지요. 학교 내 공연이라도 대본을 미리 대학본부 학생처에 넣어 허가를 받아야만 공연을 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부분 삭제된 대본으로 공연허가가 나거나 공연장에 사복경찰이나 학생처 직원들이 감시를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사회의 기성연극은 더욱 말 할 필요도 없지요.

군 생활을 하면서 <민중연극론>을 손에 쥐고 틈날 때마다 읽었습니다. 아마 그 책 내용을 익히고 깨달아가면서 평생 문화예술운동을 하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931년 브라질에서 태어난 '아우구스또 보알(Augusto Boal)'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상파울로의 원형극장의 극장장으로 1956년~1971년까지 활동하면서 많은 민중극을 실험하게 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억압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그를 이끌어 라틴아메리카 민중을 자각시키는 보알 특유의 연극양식을 실험하는 쪽으로 이끌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적 연극이론 즉 모방. 카타르시스. 감정이입 등을 주요 개념과 구조로 하는 비극적 연극체계는 인간의 잠재적 변화의지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정면 비판하고, 나아가 헤겔, 브레히트 등 시학을 바탕으로 하는 제반 연극이론들을 제3세계 민중의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비판하면서 새로운 연극의 대안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민중연극론>입니다. 브라질에서 반체제인사로 몰리면서 탄압을 피해 아르헨티나 망명을 떠나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1976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정착합니다. 이후 유럽에서 진행한 많은 실험극들의 메소드와 문화적 방법론 등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가 실험한 이미지 연극, 보이지 않는 연극, 토론 연극, 신문연극 등은 전 세계로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연극'은 가령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사복을 입은 경찰이 불심검문을 합니다. 피검문자는 검문이 정당한지 절차를 요구하며 검문을 거부하고 사복경찰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피검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자연스럽게 시민들은 이 상황에 개입하며 동참하게 됩니다. 이외 많은 시민들은 지켜보고 있지요. 결국은 불심검문의 부당함과 도를 넘어선 공권력을 비판하면서 피검문자와 개입한 시민들이 이기게 됩니다. 사복형사와 피검문자는 물론 배우입니다.

상황만 설정하고 배우의 역할만으로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고 시민들이 당할 수 있는 불심검문의 부당함을 알리고 승리의 기쁨을 선사하는 일종의 상황극 입니다. 연극은 이루어졌지만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연극이지요. 이렇듯 보알은 연극이 사회 속에서 인간을 억압하는 장치로부터 변화의 무기로 전환해나가기 위한 실천의 방법을 제시해야하며, 억압적 사회현실을 자각하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무기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민중이 제 손으로 직접 연극을 제작하는 실천적이고 독창적인 연극형태를 개발해냄으로써 자신의 '피압박자의 시학' 을 완성시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그의 연극적 메소드들은 아주 많습니다.

당시 마당극운동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지만 서구 연극의 방법론에 익숙해 있었던 저에게는 새로운 길이 확 열리는 기분이었지요. 그가 이 책에 서술한 억압과 피억압의 사회적 모순을 타개해 나가는 철학과 방법론은 이후 제가 연극 활동을 할 수 있는 큰 밑거름이 됩니다. 제대 후 1987년 민주화의 봄으로부터 시작된 커다란 물결 속에 가능한 몇 가지 연극적 실험들을 거리에서 시위장에서 함께 하면서 시민의 자발성에 기댄 그의 연극철학과 메소드는 탁월함을 새삼 느꼈지요. 이후 연극의 교육적 측면에서 아구스또 보알의 다양한 실험들은 우리나라에 수용되면서 정착되게 됩니다. 이미지 연극, 신문연극 등이 그렇지요.

아우구스또 보알은 2009년 5월 타계하였지만 지금도 전 세계에서 그의 작업들에 대한 계승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억압받는 자,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과 철학도 새롭게 해석되고 확산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으로 설레었던 20대의 한 청년에게 다가 온 <민중연극론>은 청년을 더욱 풍부하게 꿈꾸게 만든 자양분이 되었고 바람처럼 흔들려 가끔 그 길을 잃어도 등대처럼 방향을 알려주는 큰 빛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책 속의 길] 100
손병열 / '예술마당 솔' 사무국장

평화뉴스 pnnews@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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