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칼에 맞서 이성의 펜으로 싸웠던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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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병철 /『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김삼웅 저 | 책보세 | 2010)


 리영희 선생을 떠올리며

 20여 년 전 대학생 시절, 나를 언론계에 입문하는 꿈을 꾸도록 만든 인물은 바로 리영희 선생이었다.  리영희 선생과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선생의 현실을 꿰뚫어 보는 촌철살인과 같은 글과 불의와 결코 타협하지 않는 선비와 같은 지조 높은 선생의 삶이 젊은 혈기로 가득 찬 20대 청년인 내게는 경이로움과 존경의 대상이자 삶의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나에게 닮고 싶은 인물이자 영웅이었다.

 1990년대 초반의 시대적 상황은 당시 젊은이들을 좌절과 패배주의의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1987년 6월항쟁의 불길이 들꽃처럼 번져갔지만 야권분열로 끝내 정권을 군사정권의 아류인 노태우 씨에게 갖다 바쳤고, 1990년에는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 씨마저 국민을 배신하고 노태우 정권과 야합해 민자당을 탄생시켰다. 이어 몰아닥친 공안정국과 수구보수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좀처럼 어둠의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암울한 시절 국민들은 캄캄한 바다에 길을 잃고 떠다니는 배와 같은 신세였다.

 불합리와 비이성, 불의가 합리와 이성, 정의를 누르고 온 세상을 집어 삼킬 것 같은 그 시절, 리영희 선생은 어두운 밤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 리영희 선생의 냉철한 현실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적 예측은 당시 희망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함께 그래도 세상은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용기를 심어 주었다. 선생은 우리들의 사상적 은사였다.

 세월이 흘러 우리사회는 느리기는 해도 차근차근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나갔고 미흡하긴 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나가는 방향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도 이뤄졌고, 사회의 각 부분에 민주화의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희망했던 방송사 기자가 되었고, 리영희 선생과 같은 대기자가 되기 위해 언론현장을 열심히 뛰어다녔고, 차츰 리영희 선생은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인류의 역사는 변혁을 꿈꾸는 진보와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의 밀고 당기는 전쟁터라는 말이 있다. 이런 역사적 경구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우리 사회도 보수의 회귀가 이뤄졌다. 역사의 시계 바늘은 다시 20여 년 전으로 돌아갔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압도적인 표차이로 정권을 잡은 뒤, 그동안 서서히 쟁취해 왔던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 버려지듯이 내동댕이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하는 4대강 사업을 강행하여 23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강바닥을 파는데 낭비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존재했던 4대강을 마구 훼손하고 생태계에 큰 재앙을 초래했다. 국민의 건강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보며 미국산 소의 수입을 재개해 국민들에게 광우병 공포를 일으켜 엄청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경찰은 국민들에게 함부로 물대포를 쏘아댔고 국무총리실의 공직기강 감사팀은 민간인을 불법 사찰하는 등 민주주의가 땅에 떨어졌다.

 바로 이때 홀연히 나타나 이명박 정권을 준엄하게 꾸짖는 분이 있었다. 다름 아닌 리영희 선생이었다. 팔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이명박 정권을 향해 파시즘의 초기 단계라고 규정하고 역대 최악의 미국의 노예정권이라고 질타했다. 선생은 2009년 7월 1일 저녁,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행한 강연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민주주의 역사를 역행하는 이명박 정권을 꾸짖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이명박 통치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대 이 땅에서 생존했던 생명체나 개체는 현대적인 인권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아니고 동물이었다. 다행히 그 속에서 투쟁한 많은 선구자. 선배들 목숨의 대가로 지난 10년 부족하나마 인간다운 개체로서 되살아났다. 역사는 이뤄진 열매 위에 또 하나의 열매가 열리는 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늦추면 언제든 역전되는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권은 물질밖에 모르는, 인간이 지향하고 숭배해야 할 가치를 오로지 돈에만 두는, 그리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가는 이런 정권을 과거 40년의 고생 끝에 받아들인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이는 우리의 실수이고 개개인의 판단착오이고 역사의식의 잘못이었다. 짧은 10년이지만 우리가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불퇴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리영희 선생의 이런 촌철살인과 같은 한 마디 한마디는 당시 전국언론노조를 중심으로 이명박 정권의 폭거에 총파업으로 대항했던 우리 언론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든든한 원군이었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10년 12월, 향년 81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의 영웅이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것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 들고 다시 우리사회가 비상식의 긴 어둠의 터널로 접어드는 시점에 그는 눈을 감았다. 선생은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위해 박정희 정권 이래 30여 년 동안의 군사정권 아래에서 여러 차례의 옥고를 치르고 평생을 고난과 험난한 길을 살았다. 그런 선생이었기에 죽음을 앞두고도 역사를 역행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평생 우상의 칼에 맞서 이성의 펜으로 싸워왔던 선생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러던 차에 독립운동사와 친일. 반민족사 연구가이신 김삼웅 선생이 리영희 선생의 아름다운 삶을 평전으로 내놓았다. 선생의 삶을 알고 흠모했던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희소식 이었다.

이 책은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라는 짧은 문구와 함께 불의한 세상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 같은 선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책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을 적지 않게 읽어왔다고 생각해 왔던 필자로서도 막상 책장을 넘기면서 지금껏 몰랐던 선생의 숭고한 삶 앞에 숙연해졌다.
 
 리영희 선생의 삶

 리영희 선생은 1929년 12월 2일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에서 자랐다. 아버지 이근국 씨는 영림서의 경찰관이었고 어머니는 지주의 딸인 최희저 씨였다.

 일제강점기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와 부잣집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영희 선생은 5세부터 14세까지 10년 동안 유치원과 소학교를 삭주군 대관에서 다녔다. 사실상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1944년 봄 소학교를 졸업한 뒤에 경성공립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고 서울 유학생활을 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는 전시체제에 내몰린 일제 말기로 조선 청소년 대부분이 그랬듯이 선생도 고통의 시기였다. 중학시절을 궁핍과 근로동원의 억압 속에서 보냈다. 식민지 소년에게는 암울한 나날이었다. 보람이라면 일본어를 익혀 일본문학은 물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명저들을 읽을 수 있었고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은 덕분에 당나라 시를 비롯한 중국 고전을 제법 돌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공부는 후일 선생이 사회연구를 하기위해 일본어 원서나 중국어 원서를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는데, 다시 경성공립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와 그 동안 폐지되었던 한국어를 다시 배우게 되었다. 해방이 되었음을 학교 수업에서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해방의 환희와 감격은 어느 틈에 사라지고 절망의 그림자만 짙어갔다. 미군정에 줄을 댄 친일파. 기회주의자. 간상배가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정글의 법칙’이 판을 치는 사회였다.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18세 소년이 홀로 학교를 다니기에는 너무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선생은 먹고 살기 위해 모진 세파에 온몸을 맡겨야 했다.

 그러던 중 리영희 선생은 학비가 면제되고 숙식을 비롯한 경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하는 국립해양대학 창설 신입생으로 입학하게 되고 1950년 3월 해양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 부친이 교장으로 있는 경북 안동의 안동공립중학교 영어교사를 취직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을 맞으면서 영어 통역 장교로 지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 3년을 포함해 7년 동안 군대 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은 짧지 않은 군 생활을 통해 군의 잔학성과 부조리 등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군 생활을 직접 체득한 탓인지 군의 부조리한 본질을 간파하게 된다.

 군과 관련한 이런 경험들은 리영희 선생이 후일 군사정권에 지독스러울 정도로 항거하고 민주화를 부르짖는 밑거름이 된다. 제대 후에는 합동통신의 외신부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디게 되고, 1960년 4.19 혁명을 직접 체험하면서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민주주의의 희망찬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4.19혁명 기간 동안에는 미국 신문사인 워싱턴포스트에 익명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 상황을 상세히 전달해 미국 여론이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는데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 연표
<한겨레> 2010년 12월 6일자 8면
<한겨레> 2010년 12월 6일자 8면

 리영희 선생은 4.19혁명을 겪으면서 체험한 이런 경험 때문에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군사정권을 세운 박정희의 5.15쿠데타에 대해 매우 강한 반감을 가졌다. 그 덕분에 박정희 정권아래에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칼날과 같은 비판 기사와 대한민국이 들썩 거릴 정도의 특종들을 생산해 냈던 리영희는 청렴하고 유능한 기자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조선일보 외신부장까지 지냈고 치열한 기자정신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는 선생을 곱게 그냥 놔두지 않았다. 기자 리영희는 결국 청와대의 압력에 의해 언론사에서 쫓겨나고야 만다.

 리영희 선생은 십 수 년 간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기회주의 기자들의 비겁과 야비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권력을 향한 끝없는 해바라기 행태를 보인 다수의 언론계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다. 선생은 언론인의 기회주의 속성을 간파했고 언론인의 진정성과 용기를 잘 믿지 않았고 그런 판단은 틀리지 않았음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5.16 쿠데타 직후 언론인들이 보인 추태에 대해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이때처럼 이른바 ‘언론인’이라는 인간들이 비겁하고 나약한 꼴을 보인 적이 없다. 정권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언론기관 각사가 개별적으로 ‘자가 숙정’을 단행해야 하게 생겼으니 같은 사내에서 서로 눈치를 살피고, 돌을 맞지 않기 위한 추악한 작태를 벌였다. 그것은 정말로 한심한 꼴이었다. 어제까지 ‘언론인’이랍시고 어깨에서 바람소리를 내며 세상을 누비던 그 ‘기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선생이 해직될 당시인 1970년대 초반과 4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언론환경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기회주의 기자들이 견강부회로 권력에 아부하고 염치도 없이 세상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맞선 양식 있는 기자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일신의 영달을 위해 어제까지 동지였던 동료들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군사정권 시절에야 생명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어서 그래도 이해의 여지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 배반의 이유이다. 이런 언론인의 추악한 모습은 죄질로 따지자면 40년 전보다 훨씬 악질이라고 할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의 해직은 언론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나라 지성계 입장에서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대학교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선생은 더욱 치열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냉전적 사고로 가득한 당시 우리 지성사회에 선생의 글들은 청량제와 같았다. 냉철한 현실인식과 폭 넓은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을 담은 선생의 글들은 한줄기 신선한 빛이었다.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한 현실에 대한 칼날같은 비판과 예리한 통찰력 있는 전망은 선생의 가치를 더욱 드높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베트남 전쟁><8억 인과의 대화> 등 명저들은 당시 캄캄한 암흑 속에서 두려움과 억눌림에 고통 받던 젊은이들에게 희망 그 자체였다. 선생의 책을 보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사상적 깊이를 더해갔다. 리영희 선생이 사상의 은사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리영희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현실 참여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필화사건에 휘말려 감옥을 드나들었고, 그러면서도 군사정권의 폭압과 대중의 ‘우상의 광기’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타협하지 않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 그저 평범한 언론인이었던 그가 저항과 비판의 지식인, 사상의 투사로 변모했다. 선생을 투사로 만든 것은 바로 비상식과 광기의 시대였다. 그러나 선생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리영희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이 대변혁을 이루고 있기 전부터도 제도나 체제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히 여겨왔습니다. 해방 이후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관은 자유와 평화를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창의를 억제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맞서 분노를 가지고 싸워왔어요. 군사적 방식 및 철학에 대한 거부, 총체적 평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이지요. 앞으로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추구가 더욱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1980년대에 거세게 몰아닥친 ‘좌편향’의 목소리에도 경도되지 않았고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더불어 재빨리 변신한 ‘역풍’에도 초연했다. 오히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통찰을 제시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역설하면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
 
"나는 좌. 우의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적 권력이건 진실을 은폐. 날조. 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을 글 쓰는 목적으로 삼고 일관하였다. 광적인 반공. 냉전. 전쟁애호. 반통일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특히 그러했다. 진실은 균형 잡힌 감각과 시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와 우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맞고, 인간 사유의 가장 건전한 상태이다. 진보의 날개만으로 안정이 없고, 보수의 날개만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균형 잡힌 인식으로만 안정과 발전이 가능하다."

 부정하고 사나운 권력의 치맛자락으로 기어든 속물 지식인. 언론인이 판치는 가운데 선생은 시선을 역사의 지평에 고정시킨 가운데 진실을 탐구하고 전하는데 온 열정을 바쳤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해방 이후 온통 기회주의와 협잡이 판치던 한국사회에서 신념을 갖고 진실의 편에 선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하고도 외로운 행보였다.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요인들이 5.16 쿠데타 정권에 가담하고, 4.19혁명 주동자들이 군사정권과 유신권력에 협조하고 참여한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누렸다. 쟁쟁한 반독재 지식인. 언론인이 신군부 정권에 봉사하고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386세대 가운데 다수가 양지를 좇아 수구세력에 가담하였다. 이처럼 변화무쌍하고 난장판인 격변기에 진실의 편에 서서 양심을 지키는 일은 구도의 길만큼이나 험난하고 고단하였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결코 기회주의자의 삶을 살지 않았다.

 리영희 선생의 서재에는 오래 전부터 선생이 존경하는 백범 김구선생의 오언절구 붓글씨 복사판이 걸려있었다. 서산대사가 지은 시다. “ 踏雪野中去 , 不須胡亂行 ,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된다”]

 이글은 아마도 선생의 좌우명이었던 것 같다. 선생이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는지, 왜 부끄러운 행보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우리들의 영웅인 리영희 선생이 이승을 떠난 지 벌써 만 3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겨울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선생이 그렇게 증오했던 이명박 정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당신이 그렇게 부수려고 노력했던 ‘냉전의식’이라는 우상은 다시 활기를 펴고 세상으로 나왔다. 포효를 하며 온 세상의 이성을 다 삼켜버릴 것 같은 기세다. 하지만 내 눈 앞에는 온통 뒤덮은 하얀 눈밭 위를 오롯이 걸어간 발자국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전진해 나간 발자국들.. 오늘따라 선생의 그림자가 더욱 커 보인다.
 
 
 





[책 속의 길] 111
심병철 / 대구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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