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세대의 아픔...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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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선우 / 웹툰 『곱게 자란 자식』 (글·그림 이무기 지음 | 영컴 펴냄 | 2014)

 
 다음 웹툰 <곱게 자란 자식>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홉대 맞고, 한대 깐다.’ 한 번의 통쾌함을 위해 여러 번의 불쾌감을 견뎌야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 후반이라는 것을 보면 대략적으로 일제의 폭력에 맞선다는 뜻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웹툰에 항일투쟁을 벌이는 독립운동가나 광복군이나 숨겨둔 무술 실력으로 일본 순사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을 평범한 시골사람들이다.

 1910년의 국권 강탈 이후 1945년 해방까지 역사적 맥락을 알려주는 정보도 없다. 다만 작품이 전개되는 시기만 적혀 있다. 시작점은 35년간의 일제강점기 가운데 민족말살통치기가 시작되던 1938년, 종료점은 해방 1년 뒤인 1946년이다. 중요한 역사적 시기를 다루면서 실제 역사적 사건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웹툰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일제강점기 때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창작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은 대개 두 축으로 나뉘는데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거나, 상상력이 많이 들어가거나. 하지만 <곱게 자란 자식>은 어느 한 축에만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 덕분에 ‘국뽕’이나 창작으로 인한 역사적 왜곡 논란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다뤄지는 클리셰(상투적인 장치)를 유쾌하게 깨는 해학이다. <곱게 자란 자식>은 일제 폭력의 양태를 진지하게 담아낸다. 주인공 간난이의 아버지는 일본의 앞잡이가 된 면서기 박출세에게 맞아 목숨을 잃고, 세 오빠는 강제 징용돼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마을에서 제일 예뻤던 언니 순분이는 위안부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다. 공출과 징용,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강점기 어두운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위트와 해학을 잃지 않는다. 가슴이 먹먹해져 더 이상 보기가 어려워질 때쯤 과하지 않은 ‘병맛 유머’로 웃음을 선사한다. 해학과 현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독자들을 쥐락펴락 한다. 가슴 아픈 역사 문제를 다루되, 웃음과 감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 <곱게 자란 자식>은 어려운 과제를 보란 듯이 해낸다.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등장인물들이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간난이를 포함한 인물들이 단순히 시대의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납작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이분법으로 ‘우리 편’과 ‘나쁜 놈’을 명확히 나누고 민족주의에 입각해 이야기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덕분에 독자들은 야만의 역사를 선악 구도가 아니라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일본군 연대장 하시모또, 오오시마 대위, 코지마 중위 등 일본군은 단순한 가해자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각자 야욕을 드러내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친일파를 이용한다. 면서기 박출세와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가네모또, 출세를 위해 변절한 조시중 등도 다양한 군상으로 표현한다. 이들의 폭력은 너덜너덜해진 피해자의 육체의 피로와 무력감을 너무도 당당한 가해자와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입체적 인물들의 대표적인 예는 마을의 남성들이다. 웹툰에서는 공출 전 평화로운 마을에서 남성의 우월한 지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간난이를 비롯한 여성들은 남편 혹은 남자 형제들과 한 상에서 밥을 먹지 못한다. 억척스럽게 논밭 일을 하고도 밤새 가사일을 도맡아야 한다. 나이가 많아도 남성과 나란히 걸을 수도 없다. 여성들을 하대하고 거드름을 피우던 남성들은 막상 일본 순사(나으리)를 마주칠 때면 쪼그라든다. 못난 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남성성의 허구성을 까발린 것이다.

 마을 남성들은 그토록 흠모하던 순분이가 위안부로 끌려갈 때 어느 누구도 구하지 못한다. 반면에 힘없는 여성인 간난이는 피해자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굳건히 생존한다. 위안부 공출을 피해 지하에 숨어 굶주림과 공포를 견뎌내고 친한 동무들이 일본군에 끌려가도 악착같이 숨고 도망친다. 작품 후반부 몇 차례 위기에서 조력자들이 등장하지만 간난이 스스로 강력한 삶의 의지를 내비친다. 삶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살아남은 게 끝내 속이 후련한 점이 된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일제강점기 때 핍박받던 조상들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 그리고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곱게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분들 덕분에 곱게 자란 우리들이 다음 세대에도 곱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물려줘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의무를 다하려면 앞선 세대의 아픔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도 깔려 있을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을 두고 ‘소재에 대한 피로감’을 말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책 속의 길] 142
손선우 / 영남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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