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 가장 어둡고 낡은 공동체 대구 동인아파트. 4층짜리 5동은 섬처럼 50년을 버텼다.
자정을 넘겨 그 아파트로 향하는 골목길은 아파트 얼굴처럼 척박하다. 불빛 희미한 도로에 페인트칠 다 벗겨진 '동인' 글자가 안내판 역할을 한다. 낮엔 제법 찾기 쉬웠는데 밤이되자 분위기가 영 다르다. 사람 발길은 끊겼고 길고양이 몇 마리가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기척을 낸다. 누가 자는지 깼는지 밖에서도 훤희 보이는 개방된 복도. 두 세집 건너 창문 마다 침침한 불빛이 일렁인다.
'끼익' 2동 4층 중간방 현관문이 열렸다. 금방이라도 부숴질 것 같은 고동색 목재 문 사이로 세입자 할아버지가 두툼한 점퍼를 껴입고 나왔다. 복도에서 담배에 불을 붙여 아래를 내려다본다. 5동으로 가는 내 발걸음을 잠깐 잡아챘다. 올려다보며 내가 묵을 동으로 갔다. 은행나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대구시 중구 동인동3가 228번지 동인시영아파트 5동 37호에서 지난 21일 하룻밤을 보냈다. 지역 예술가 단체인 '동인동인(東仁同人의 조경희 작가)'은 동인아파트가 사라지기 전 일부 방을 게스트하우스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대여 중이다. 1박 2일 간 내가 지낸 방은 철거를 앞두고 한 세입자 할머니가 떠난 5동 37호다. 할머니는 이제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할머니가 방 곳곳에 남긴 흔적만 사람이 머물렀다는 것을 증명한다.
벽엔 37호에 묵었던 이들의 손 편지가 붙었다. 올려다보니 가장 오래된 누런색 벽지를 포함해 색이 4개나 된다. 이리 저리 생활의 편리를 위해 덧바르다보니 색깔이 뒤섞인 모양이다. 키낮은 방문과 문고리에는 청테이프의 끈적한 접착제가 가득이다. 아무리 청소해도 사라지지 않는 할머니 흔적이다. 방마다 뻥뻥 뚫린 못자국도 그렇다. 청소해도 사라지지 않는 욕실 바닥 시멘트 푸른 이끼도 그렇다. 함께 묵은 이와 할머니가 도대체 무엇을 했길래 이런 흔적을 남겼을까 추정해봤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부엌은 거실에서 2계단 정도 내려가는 푹 꺼진 구조다. 아파트에서 연탄보일러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서 대신 보엌엔 기름 보일러가 큼지막하게 자리 잡았다. 보일러가 밤새도록 시끄럽게 돌아간다. 복도에 있던 연탄 쓰레기통이 녹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파트 곳곳에 50년 나이테가 가득했다.
씻으려고 욕실에 갔는데 세면대가 없다. 쪼그려 앉아야 한다. 수도꼭지에 물을 틀어 세숫대야에 받아썼다. '젊으니 감당하지 할머니는 일어났다 앉았다 꽤 불편했겠다' 잠시 생각했다. 불을 끄고 광목천 이불에 누우니 창호지에 달빛이 액자 같다. 몇 호 누가 아픈지 밤새 밭은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22일 아침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에 잠이 깼다. 나무 창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열린다. 앞동의 나선형 복도 계단이 훤희 들어온다. 짐을 챙겨 37호 방을 나왔다. 어둠에 가려졌던 동인의 얼굴이 더 자세히 들어온다. 김장철이라 할머니들이 이집 저집 모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수다를 떤다. 복도에는 무말랭이가 널렸다. 11월치고 제법 날씨가 따뜻해 주민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내내 집안에 있던 화분도 줄지어 복도 난간에 올랐다. 국화꽃이 핀 '동인행복정원'에는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앉았다. 백로떼가 똥을 싸고 소음을 낸다고 몇 년 전 모조리 잘려 이제는 밑동만 남은 히말라야시다 7그루에는 '밑동' 탁본 그림이 붙었다. '오래된 것들이 지워지지 않기를 잊혀진 것들이 소중히 간직되길' 문구가 내걸렸다. 백로떼처럼 아파트 주민들도 곧 이곳을 비워야 하는 신세는 같다.
서세아 할머니에게는 동인아파트가 첫 보금자리다. 할머니는 김미련 작가의 '272, 미완의 인터뷰' 작품에서 고백했다. 세입자보다 형편이 낫지만 여기가 마지막 주거지인데 어디로 가겠냐며 나름 최근엔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새다. 집을 지키고 싶다는 게 할머니 심정이다. 1동 1호 할아버지는 1969년 설립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을 찾아온 것을 아직 추억한다. "박통이 우리 집에 다녀가서 내가 오래 사나보다" 묻지도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자랑스럽게 말했다.
2동 4호 한진교(57) 아저씨는 오전부터 바쁘게 이동 저동을 왔다갔다 한다. 아저씨는 동인아파트가 고향이다. 유년 시절 나선형 계단에서 딱지도 접고 구슬치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했다. 아파트 전체가 놀이터였다. 85세 이화순 할머니는 아파트 정원을 계속 가꾼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여기를 떠나며 아는 사람도 없는 원룸이나 더 안좋으면 쪽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가고 싶지 않다.
정시연(76) 할머니도 이곳이 좋다고 한다. 아들 집에 가는 것보다 혼자 당당히 사는 게 편하다고 한다. "하꼬방 살다가 여기오니 호텔이라. 모여서 윷놀이도 하고 노래도 하고 장례도 치르고 혼자가 편타"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100여 가구가 떠나고 남은 190여가구의 25%가 기초생활수급자일정도로 저소득층이 많은 아파트. 월세 10만원이면 공동체 속에 살 수 있는데 떠나자니 쉽지 않다.
가난하지만 소박한 마지막 둥지는 곧 사라진다. 한때 가장 높았으나 이제는 가장 낮아진 나의 살던 고향, 누군가의 유년 시절 놀이터, 남편과 함께 공동명의에 오른 첫 보금자리. 아파트를 나서는 게시판마다 가로주택정비사업 임시총회를 알리는 현수막과 각종 재건축 공고문이 붙었다. 대도시는 공간 낭비를 허용치 않고 정치인들은 허름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 속에 삶들이 깨지고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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