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 우리민족 통일 세상, 노동자 주인 세상"
민중의 벗. 민주화 운동 대표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원작자 통일운동가 고(故) 백기완(1932~2021) 선생이 지난 15일 89세 나이로 별세하자 대구 등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차려져 추모객이 이어졌다.
대구 7개 시민·사회·노동단체(6.15대경본부·대구경북진보연대·대구경북추모연대·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대구민중과함께·민주노총대구본부·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는 16~18일 4.9인혁재단 지하강당 공간7549(중구 서성로 14길 59)에서 '노나메기 세상 고 백기완 선생 사회장 대구시민분향소'를 운영한다. 매일 정오부터 오후 8시까지 사흘동안 분향소를 열고, 조의금과 화환은 고인 뜻에 따라 받지 않는다.
분향소 영정사진 옆 현수막에는 백기완 선생이 생전 남긴 염원들이 적혔다. '노나메기'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란 뜻으로 백 선생의 생전 핵심 사상이 담긴 단어다. 백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씨에 대한 복직을 기원하는 응원 문구도 분향소에 적혔다. 산업재해로 희생되는 노동자들의 노동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야한다는 말도 남겼다.
고인의 염원 옆에는 후배들의 정신 계승 다짐이 적혔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모두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우리민족의 통일세상을 이뤄, 노동자 주인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선생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했다. 조문객들 방명록에는 "평화 통일의 큰 뜻 이루겠다", "앞서서 나가니 뒤따르겠다", "진정한 민주주의 나라 만들겠다", "당신의 길을 따르겠다", "못 다 이룬 민중의 꿈을 잊지 않겠다" 등 고인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말들과 함께 "그 곳에서 영면하시길 바란다"는 추모 문구가 적혔다.
분향소 한 켠에는 1950~2020년까지 고인의 운동 역사가 담긴 사진전도 진행됐다. 한일협정반대운동, 유신반대 운동, 김귀정 열사 폭력살인 규탄 집회 연설, 제13~제14대 민중후보 대통령선거 출마,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 곡절마다 삶의 현장에서 시민과 함께한 고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심이의 엄마생각>, <두 어른>, <버선발 이야기> 등 백 선생의 유작도 분향소 주위에 놓였다.
곽병인(49)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민주, 통일운동의 가장 큰 어른이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며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억압 받는 민중의 삶을 고민하고 놓지 않아 살아 있는 우리가 통일된 좋은 세상을 만들고, 앞서 떠난 열사들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고 말했다.
시민 김주욱(37.대구 북구)씨는 "민중, 민주, 통일이라는 역사의 과제가 옅어져가는 시대에 백 선생이 돌아가셔서 그런 가치들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됐다"며 "대구에도 분향소가 차려져 시민의 입장으로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게 됐다. 그러한 울림들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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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고 백기완 선생은 1932년 북한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1946년 남한으로 왔다. 1954년 농민, 빈민, 녹화운동을 했고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을 맡았고, 1974년 유신반대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투옥됐다. 이어 19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다시 투옥됐다. 1983년에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맡았고, 1985년에는 통일문제연구소를 차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소장을 맡았다.
1986년에는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감옥살이를 했다. 1987년에는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무소속 '민중후보'로 입후보했다. 1990년에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을 맡았고, 1992년에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선거에서는 모두 낙선했다. 1997년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0년 계간지 '노나메기'를 발행했다. 같은 해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에 올랐고, 2010년 노나메기재단 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 15일 폐렴 증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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