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과 지옥의 경계에 선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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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우 /『신곡 - '연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l 박상진 옮김 l 민음사 펴냄 l 2007)


어디선가 실패박람회를 연다고 했을 때 처음은 매우 의아했다. 보통 신기술을 널리 알리거나 이미 검증된 콘텐츠를 모아 종합세트처럼 대중에게 자랑하는 게 박람회인데 실패를 전시한다니. 속도와 경쟁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실패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여서 관심조차 미약하거나 실패에 이른 속사정을 다 까 보이는 것도 억울할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실패는 성공은 어머니라고. 단박에 성공할 일이란 극소수의 범주에서나 발견되는 사례고 우리 같은 범부의 인생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다 따지고 보면 결국 어떠한 작은 성공도 모두 실패를 거울삼아 재기한 자가 받는 선물이었던 셈이다. 아, 와신상담이란 말도 있네. 인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는 말로 실패를 탓하지 말라는 개똥 격언도 생각이 났다. 이처럼 얕은 생각에 잠겨있던 내 머리를 턱 치니 아직 별 볼 일 없는 내 인생에도 빛이 보일 것 같은 설레발까지 발동하는 순간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실패박람회로 돌아오자. 하여튼 이런 발상이야말로 1등 아니면 루저로 치부되는 오늘의 격차 사회에서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기획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나는 패자부활전이란 말을 좋아한다. 1등과는 조금 멀어져도 자기만족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란 얼마나 괜찮고 고마운 일인가 하면서.

그런데 육체적 생명을 마친 사람이 인생을 통틀어 평가받아 천국과 지옥행을 인도받게 될 때는 어떨까. 단 한 번 이승에서의 삶만으로 천국과 지옥행이 영원히 결정된다는 게 야속하지는 않을까. 어차피 첫째 인생에서는 글렀다 치더라도 다음 생에서는 다를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지옥이 그저 벌 한 번 받는 것으로 그친다면야 모르겠지만 단테가 그린 지옥도를 보면 금세 모골이 송연해지고 몸서리가 쳐진다. 영혼이 벼랑으로 계속 떨어지거나 더러운 똥을 투척 받는 건 기본이다. 죄인들끼리 서로 할퀴고 있는 건 시작에 불과하고 불어오는 태풍이 사정없이 회초리 세례를 날리거나 붉은 피가 펄펄 끓는 강물에 푹 삶겨지는 것도 다반사다. 게다가 지하세계의 괴물이며 머리가 세 개 달린 개인 케르베로스에게 몸뚱이를 물어뜯기고 찢어발기는 곳에도 가야한다.  
 
『신곡 - 연옥편』(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l 박상진 옮김 l 민음사 펴냄 l 2007)
『신곡 - 연옥편』(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l 박상진 옮김 l 민음사 펴냄 l 2007)

이런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천국으로 갈 만큼 생이 그만큼 선했냐는 게 문제다. 그런데 범부들로서는 천국은 너무 먼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연옥이다.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갈림길에서 머물 수 있는 일종의 경계지대로 이해하면 된다.

“이제 나는 인간 영혼이 정화되고
천국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 두 번째 왕국을 노래하려 한다”
(신곡 연옥 편 1곡, p7)


단테는 지옥으로 직행하는 폭력이나 기만, 배반보다는 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죄를 지은 사람이 갈 곳으로 연옥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죄란 어떤 것인지 한번 살펴보자.

첫 번째로 만나는 연옥의 둘레에는 교만의 죄가 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와 과부 같은 인물이 등장하고 그리스 군에게 멸망한 트로이 이야기도 나온다. 이들이 받는 고통은 머리를 쳐들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생전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거만하게 아래를 누른 것에 대한 벌쯤 되겠다.

다음은 시기의 죄다.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유형이다. 사실 시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한 일이다. 더 가진 사람을 미워한 그 까짓것으로 벌을 주려는 건 좀 과하지 않냐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시기를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원하며 즐긴 죄다.

세 번째는 분노의 죄. 교만이나 시기와 함께 모두 빗나간 사랑을 할 때 생겨난다는 게 공통점이다. 자기애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태만이다. 주어지는 고통이란 게으르지 않도록 계속 달리는 것이니 아주 정직한 벌로 여겨진다. 그 다음은 탐욕과 낭비로 이어지는데 세속적인 것에 눈이 멀어 위를 바라보지 못하는 게 원인이다. 연옥의 마지막 구성에서는 정욕의 죄를 다스리고 있다.

이처럼 연옥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죄는 지극히 도덕적인 영역이다. 집단 살인자 같은 중죄인은 지옥행을 벗어날 수 없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연옥에 머무를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패자부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 단 쉽지는 않다. 무려 500년 동안 자기 죄를 다스린 이후에야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갈 수 있으니까.

단테는 <신곡>을 통해 인간의 상상으로만 그려지던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기를 쓰듯 생생하게 펼쳐놓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오로지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근원적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때로, 교황의 권위가 인간의 이성 위에 군림하던 암흑기였다. 단테는 평범한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동시대에서 누구나 노력하면 천국에 오를 수 있다는 점을 연옥 편을 통해 비치고 있는 것이다.

훗날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통해 어떤 죄인도 누구나 천국에 오를 수 있다며 면죄부 발행을 남발하던 가톨릭계의 부패를 비판하고 나서긴 했다. 단연코 연옥의 세계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개인적으로 지옥 편과 천국 편보다 연옥 편이 더 끌린다. 어느 시대인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의 사회가 과연 있었을까. 가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오늘날에는 공정이란 말이 더욱 희화화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단테의 연옥이 ‘루저’와 패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공평한 기회로서 패자부활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좀 비뚤어진 과거가 있어도 도덕적 삶의 추구로 행복에 이르길 원했던 단테의 이야기를 더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지옥 편과 천국 편도 읽어보길 권한다.

 
 
 






 [책 속의 길] 201
 송영우 / 동네책방협동조합 <책방아이>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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