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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궐하는 암과 정부의 책임”

기사승인 2005.05.02  09: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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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의협'의 의료 진단 1 > 김진국(신경과 전문의)
“암 환자 한해 11만명...암을 비롯한 비급여진료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질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람의 몸 속으로 은밀하게 깃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사회에 만연하는 질병의 속성과 그 질병에 대한 집단 전체의 대처방식은 그 사회의 수준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창백해 보이는 결핵 환자에게는 언제나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왔던 고달픈 삶의 흔적들이 은근히 묻어난다. 한 사회에 결핵이 창궐하고, 그로 말미암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간다면,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거리는 의학기술의 수준이라기 보다는 바로 ‘가난’일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의료수준은 질과 양 두 측면에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술이 이루어지고 있고, 특히 복제술과 같은 첨단시술은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며 선두자리를 다투고 있을 정도이다. 그 잘난 기술로 이제는 소모적인 복지보다는 이윤을 창출하겠노라며 지방자치단체마다 앞 다투어 의료특구를 건설하려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가난과 불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결핵 환자의 발생율은 OECD 가입국가 중에서 당당하게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 사회의 가난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있고, 의학기술의 수준이 그 사회의 건강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설명해 주는 증거다.

그래도 결핵은 잊혀진 질병이라고 볼 수도 있다. 풍요가 넘쳐흘러 음식이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는 이 화려한 세상에 어처구니없게 결핵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은 한 쪽 귀퉁이로 밀려나온 소수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한 해에 6만 명이 넘는 목숨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암에 견주어 보면 결핵은 분명 잊혀진, 의학교과서에만 기록된 역사의 질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한 해 11 만 명이 넘는 암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그 대상은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지병을 앓다 세상과 작별했다는 부고를 받았을 때 그 사람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사연을 굳이 캐묻지 않더라도 대충 암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짐작하면 될 만큼 암이 창궐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질병이 창궐할 때마다 권력은 분주해졌다.
동아시아권과 달리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을 신봉치 않았던 서구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질병이 창궐할 때 권력이 손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병자들의 구휼에 나섰던 것은 질병이 대규모 재앙으로 번지게 되면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온갖 암이 창궐하고 있는 이 시대의 권력은 느긋하기 짝이 없다.
의과학의 발전으로 질병의 속성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질병은 병자의 몸 안에 갇히게 되었고, 그 대신 통치권력은 질병의 책임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 탓인지도 모른다. 암이 창궐하는 이유는 아직 탐구의 대상으로 남아 있을 뿐 아직 뚜렷한 답이 없다.

암을 묻혀 오는 이 시대의 삶의 양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것은 문명과 진보를 부정하는 불경한 짓으로 간주되기에 암의 원인을 찾는 시선은 줄곧 사람의 몸 속에만 갇혀 있다. 사람의 몸 속을 끝도 없이 파고들던 의학자들의 시선은 이제 유전자에 고정된 채 암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 결과 의학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암의 원인은 잘못된 유전자가 장착된 몸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집에서”, “피 한방울로” 암을 진단하고, “주사 한방”이나 “유전자 치료”로 암을 완치할 수 있다는 환상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 생명공학 산업이 21세기의 주력산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이윤을 챙겨 가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 이윤이 국민의 건강수준을 높이는데 사용될 것이란 전망은 불투명하다.

정부는 헐벗고 병든 자를 위한 정부의 구휼제도는 완결상태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민중들의 수백 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로 사회보장제도가 완성된 서구사회와 달리 우리는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된 지 10여 년 만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되었고, 일부 극빈층(1종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해서는 ‘극히’ 한정된 수준에서 무상진료까지 실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중병에 걸려 병원에 가본 사람은 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 뿐이라 ‘언 발에 오줌누는 효과’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질병에 대한 은유적 표현은 질병과 관련된 그 시대 문화를 반영한다.
‘문디(문둥이)같은 놈’이란 말은 한센(나병)병이 불치의 천형으로 인식되던 시절의 정서와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암이 창궐하는 이 시대에는 ‘암적 존재’라는 말이 사람들의 대화 속에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 말은 암 환자들이 서서히 자신의 몸을 소진시켜 가는 동안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가는 진료비 때문에 가정마저 파탄에 빠지고 말더라는 참담한 현실을 반영한 것 아니겠는가? 사람들 입에 ‘암적 존재’란 말이 거리낌없이 사용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사회보장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난 해 보험재정은 1조 이상의 흑자를 냈지만 정부는 쓸 곳을 정하지 못한 채 곳간에 꽁꽁 묶어두다가, 최근 암 환자에 대한 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가뭄 뒤에 쏟아지는 단비 같은 소식일 것이다.

하지만 비급여진료에 대한 개혁 없는 지원 확대는 진료비를 조금 더 깎아 주는, 생색내기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암 환자의 진료비가 다른 질환과 달리 온 재산을 탕진할 정도인 것은 유난히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비급여진료가 많기 때문이다.

창궐하는 질병을 구제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책임은 정부에 있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지금 창궐하고 있는 암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가 만들어 낸 병이다. 당연히 정부가 책임을 져야한다. 그 책임을 떠맡는 것이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진국(의사. 신경과 전문의.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 [인의협]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줄임말로, 5월부터 시작한 평화뉴스 <인의협의 의료 진단>은, 대구경북인의협 회원들이 의료정책과 의료계 관행, 건강 문제 등을 매주 돌아가며 짚어줍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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