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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아버지를 추억하다

기사승인 2009.05.08  00:3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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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미강..."세상 하찮은 것 하나 없다시던 아버지.."

 
 
▲ '전파사'를 하신 아버지..."기계도 아퍼서 온 손님이니 예의를 지켜야 한다"시며 늘 정장 차림으로 일을 하셨다.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특별한 존재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분이셨다. 어릴 적부터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야’하고 물으면 난 ‘우리 아버지요’하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랑과 존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부터 아버지는 높은 하늘 같았고 품 넓은 바다 같았으며 당당하게 자리한 산 같은 분이셨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지위가 높은 분이셨거나 재산이 많은 부자는 아니셨다. 충청도 서천군 그리고도 한산면이라는 지극히 작은 동네에서, 당시 동네 최초로 전파사를 운영하셨던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를 나와 석유장사를(장사라기보다는 아르바이트였던 듯싶다) 하시며 혼자 힘으로 중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전기가 부족했던 당시에 촌은 여전히 호롱불로 살았고 아버지는 그런 틈새시장을 이용해 멀리 떨어진 석유가게에서 기름을 떼다가 동네 집집에 약간의 수익을 얹어 파셨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방송통신고를 잠시 다니셨다고 들었다.

상황이 지나치게 어렵다보니 공부를 하고 싶어도 꿈을 이루지 못하셨던 아버지는 여러 일을 하시며 익힌 기술로 우리 동네 처음으로 ‘미음소리사’라는 전파사를 여셨는데 10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 가게와 방이 하나 딸린 집에서 여섯 명의 식구가 참 단란하게 살았던 기억이 난다. 아름다운소리라는 뜻의 ‘미음소리사’는 후에 ‘소리’가 중복된다는 지적을 받고는 ‘미음사’로 고치셨다.

내 기억의 아버지는 정말 부지런하셨고 또 무척 깔끔하셨다. 여명의 시간에 일어나 세수를 하시고 가게 구석구석과 집 앞을 말끔히 청소하신 다음에야 잠에 지쳐있는 우리들을 깨우셨다. 깨우실 때는 ‘미강아!’하시며 내 등을 쓰다듬어주시곤 했는데 그 손길은 여전히 내 등에 매달려 간혹 그리움으로 떨게 한다.

전파사라는 이점은 어린 내게 치기어린 자부심을 던져 주었다. 텔레비전이 귀했던 시절, 저녁이 되면 우리 가게는 그야말로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는데 일찍 식사를 마치고 누구보다도 빨리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동네 아이들이 앞 다퉈 가게로 들어왔고, 오빠들은 완장 찬 이장님이라도 된 것처럼 질서를 잡곤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을 볼 때면 아이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사람은 오빠들이 아닌 바로 나였다. 정 중앙에 의자를 놓고 아버지가 앉으시면 난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는데 채널을 돌릴 때도 캥거루처럼 아버지의 손에 안겨 있었으니 또래 아이들의 부러움이란 상당히 큰 것이었으리라.

세 명의 아들만 줄줄이 둔 아버지에게 난 특별한 딸이었다. 양념딸이라고 해서 예쁘지도 않은 나를 사람들이 올 때마다 인사 시키곤 하셨는데 숙기가 없던 나는 그 자체가 부끄러워 도망 다니곤 했었다.

 
 
▲ 우리 가족...세 명의 아들만 줄줄이 둔 아버지는 나를 '양념딸'이라고 하셨다.

 ‘미강’이라는 내 이름도 아버지가 지으셨다. ‘米쌀미 江강강’. 이름에 米자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아버지는 나를 ‘쌀뜬 물’(직역을 한다면 분명 그렇다)로 만들고 마셨다. 하지만 난 어릴 적부터 그런 놀림을 받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난 아버지를 믿으니까. 그렇게 이름 지은 아버지에게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아버지에게 전해들은 내 이름에는 삼국시대의 역사성이 묻어있다. 백제땅에서 태어난 나에게 아버지는 백제인이 가지는 지혜를 이름에 넣었고 ‘만인에게 이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을 새겨주셨다.

‘백제 병사가 신라 병사에게 쫓기는 도중, 앞에 큰 강이 가로막아 도망을 갈 수 없게 되자 백제인들은 가지고 온 군량미를 이용해 강을 건넜다고 한다. 강물은 그 군량미로 인해 쌀뜬 물처럼 뿌옇게 되었고 백제 병사들은 군량미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옛 이야기를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셨던 아버지 친구분에게 들으셨고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내 이름에 적용하신 것이다.

 
 
▲ 아버지 어머니 혼인 하던 날...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는 나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셨다.

언젠가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고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아버지 꿈이 뭐였는 줄 아냐? 의사가 되는 거였어“ 하셨다.
“의사유?”
“그려, 근디 원체 어려워서 공부를 못혔잖냐. 그려서 생각혔지.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안되믄 기계를 고치는 의사가 되야것다. 허고 말여”

그때 난 비로소 알게 됐다. 아무리 더워도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셨고 긴 바지를 입으시며 일을 하시던 이유를 말이다.

서해의 찐득한 바람으로 가게 안이 찜통이 되어도 아버지는 반 정장을 입고 일을 하셨다. 도저히 더워 참을 수 없을 경우는 반팔 러닝을 입고 절대 반바지는 입지 않으셨다.

다른 가게 아저씨들이 반바지에 러닝만 입고 일하시며 아버지에게 ‘덥지 않냐’고 핀잔을 줘도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기계도 말여. 감정이 있는 거여. 아퍼서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니 의사가운은 안 입드라도 예의는 지켜야 할 거 아녀.”

떠나실 때까지 변변한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셨지만 아버지는 동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 때면 꼬박꼬박 ‘라디오’ 같은 졸업선물을 내놓으셨다. 그 라디오에는 ‘미음사 기증’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는데 배움에 대한 아버지의 아쉬움이 담겨 있는 듯 했다.

비록 당신께서 원하는 만큼 배우지 못하고,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하셨지만  ‘이 세상에는 하찮은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다 존귀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그에 대한 예의를 다 갖췄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나 또한 그리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깊어진다.

2009. 5. 8일

그리운 아버지 권순식씨의 양념딸 권미강

 
 

 

 

 

[주말에세이] 권미강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소리'라는 뜻의 <미음소리사>...훗날 '소리'라는 말이 중복된다시며 <미음사>로 이름을 바꾸셨다.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와 고모부)

 

평화뉴스 pnnews@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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