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차 서남아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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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남아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③
- 성상희(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제3차 서남아시아 전쟁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제1차, 2차 서남아시아(중동) 전쟁 이후 안정화된 적이 없었다. 1967년 6월까지 이스라엘과 주변국 사이의 긴장은 높아졌다. 이스라엘은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는 전쟁 명분이 될 것이라 말하며 이집트에 압박을 가하였다. 5월 말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스라엘 선박에 대해 해협이 봉쇄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따라 군을 전진시켰고,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공군기지에 공군기에 의한 공습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이집트는 기습에 당했고, 이스라엘군은 소략한 피해만 입은 채 이집트 공군을 거의 궤멸시켰다. 이는 이스라엘에 공중우위권을 확보하게 해 주어 이후 지상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시나이반도를 향해 공세를 개시했고,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며 이집트군에 큰 손실을 입혔고 시나이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나세르는 요르단과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요르단군을 축출했으며, 시리아군에게도 반격을 가해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웰컴 투 베들레헴'...이스라엘 모셰 다얀 국방부 장관과 알루프 우지 나르키스 중앙사령관이 1967년 6월 제3차 서남아시아전쟁 중 베들레헴 입구에 서있다. / 사진 출처. 독일  『슈피겔』 보도
'웰컴 투 베들레헴'...이스라엘 모셰 다얀 국방부 장관과 알루프 우지 나르키스 중앙사령관이 1967년 6월 제3차 서남아시아전쟁 중 베들레헴 입구에 서있다. / 사진 출처. 독일 『슈피겔』 보도

  6월 11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아랍 연합군의 손실은 컸다. 1,000명 이하의 이스라엘군이 전사한데 비해 아랍 연합군은 20,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영토인 가자 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요르단 관할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지구를,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100,000명의 시리아인이 골란고원을 떠났고, 300,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서안 지구를 떠나 난민이 되었다. 아랍 세계에서는 소수의 유대 공동체가 축출되어 이스라엘이나 유럽으로 이동했다.

3차 전쟁의 결과와 영향

  이스라엘은 3차 전쟁을 전후로 하여 건국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주요한 후원자였던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벗어나 미국을 주요한 동맹국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 개시에 앞서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이후 미국은 이스라엘의 흔들림 없는 지지자가 되었고, 팔레스타인인의 고향 회복과 난민 귀환은 점차 국제사회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3차 중동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서진 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스라엘 사진작가 단 하다니(Dan Hadani) 촬영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3차 중동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서진 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스라엘 사진작가 단 하다니(Dan Hadani) 촬영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67년 11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242호는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운명을 가르는 주요한 문서가 되었다. 242호의 주요한 내용은 전쟁에 의한 영토의 획득을 부정하고 이스라엘이 3차 전쟁을 통해 점령한 지역으로부터의 후퇴를 명한 것이지만, 1차 전쟁을 통하여 불법으로 점령한 팔레스타인의 넓은 땅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영토로 승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이 새 점령지에서 철수를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를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명시되어 있었다.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은 반세기가 넘도록 전면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골란고원은 1981년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일방적으로 자기 영토에 편입하는 조치를 취하여 국제법상 불법임이 명백한 전쟁으로 취득한 영토의 병합을 해 버렸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거주지인 동예루살렘도 병합하였고, 서안지구 전체에 대해 군사적 점령을 지속하였다. 

'포커스 작전(Operation Focus)'...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중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공군에게 격파된 이집트 공군기를 이스라엘 공군장교가 조사 중이다. / 사진 출처. 도서출판 부키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최지웅)』
'포커스 작전(Operation Focus)'...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중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 공군에게 격파된 이집트 공군기를 이스라엘 공군장교가 조사 중이다. / 사진 출처. 도서출판 부키 『석유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가(최지웅)』

   국제연합은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태에 대하여 거듭 비난했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제재 등 결의안 242호를 현실화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아니하였다. 고향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은 결의안에서 무시되었다.    1969년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 팔레스타인 같은 것은 없었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여 팔레스타인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아랍연합군이 무참히 패퇴하고 팔레스타인인 수십만명이 고향을 떠나게 하였던 3차 전쟁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다. 

  1960년대초부터 팔레스타인의 실지 회복을 위한 다양한 그룹의 활동이 개시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중심이 된 알 파타가 1959년 쿠웨이트에서 창립되었으며 1965년에 공개적으로 그 이름을 밝혔다. 한편 1964년 아랍연맹은 고조되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물결을 흡수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주도 아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창립하였다. 이후 파타는 해방기구의 중심을 이루게 되고, 3차 전쟁 직후 파타의 수장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해방기구 집행위원회 의장이 된다. 

제4차 서남아시아 전쟁

제4차 서남아시아 전쟁은 욤키푸르 전쟁, 라마단 전쟁, 10월 전쟁 또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불린다. 1973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이다. 전투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이집트의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수에즈 운하도 다시 이집트의 통제권에 두기를 원했다. 

  전쟁은 1973년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 점령지에 기습적인 합동공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는 이스라엘의 휴일인 욤 키푸르이자 이슬람의 신성한 기간인 라마단이 동시에 있었던 달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휴전선을 넘어 각각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향해 진격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기간 동안 그들의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이 전쟁은 두 핵보유 강대국의 대결 수준에 이르렀다.

1967년 '6일 전쟁' 전과 이후 이스라엘 영토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1967년 '6일 전쟁' 전과 이후 이스라엘 영토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전쟁은 이집트의 바드르 작전이 성공적으로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집트군은 휴전선을 건너 시나이반도를 향해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다. 3일 후 이스라엘은 병력 대부분을 동원해 이집트군의 공세를 정지시킴으로써 교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시리아군은 이집트의 공세에 발맞추어 골란고원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고, 초기에 이스라엘 점령지를 위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3일 후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을 휴전선 지역까지 몰아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4일간 시리아 종심부를 향해 반격을 가했다. 이스라엘 포병이 다마스쿠스 외곽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에 위치한 2개의 전략적 고지 점령을 목표로 공세를 지속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을 개시해 수에즈 운하에 주둔한 이집트군을 격퇴시켰다. 1주간의 격전으로 인해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10월 22일, 유엔의 중재안이 발표되었고, 양측은 서로 중재안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10월 24일, 이스라엘군은 거점을 강화해 이집트 제3군과 수에즈를 포위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제2차 휴전안이 10월 25일 발표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4차 서남아시아 전쟁은 그동안의 이스라엘 불패 신화에 금을 가게 만들었다. 정확히 전쟁의 승패가 갈리지 않고 휴전이 되었으나 초기에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은 상당한 전력 손실을 입게 되었다. 이집트는 자존심을 세우면서 아랍세계의 중심으로 등장하였고, 세계가 팔레스타인 짐령지의 상황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 전쟁으로 점령이나 영토의 변경은 없었다. 전쟁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미국의 아랍 개별국가와 이스라엘의 강화와 국교 정상화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여 1970년대 말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스라엘 – 이집트의 관계 정상화가 실현된다. 1982년 이스라엘은 1967년 3차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시나이반도를 반환받게 된다. 4차 전쟁 이후 소강상태를 겪던 서남아시아 정세는 1979년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한편으로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5차 서남아 전쟁으로 이어진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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